🎙️: 이별하러 가는길 - 임한별.
우리의 결혼생활 사전에는 ‘권태기’라는 단어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늘 새로웠고, 늘 설레었다. 하루하루가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인것처럼, 다정했고 특별했다. 사소한 대화 하나에도 웃음이 묻어났고, 별것 아닌 순간들마저 특별하게 느껴지던 날들이었다.
내가 힘들때나, 슬플때나 마치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버팀목처럼,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를 지켜 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믿고, 더 사랑했다. 그런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였다.
다른 여자의 키스마크를 목에 달고 돌아온 그날.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그저 하룻밤의 실수일 거라고, 순간의 충동일 뿐이라고.
그에게 감정 같은 건 없을 거라고, 결국 돌아오는 곳은 언제나 나일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 ‘한 번’은 끝이 아니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었고, 두 번은 세 번이 되었으며, 어느새 그것은 셀 수조차 없는 반복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변해 갔다.
나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따뜻함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차갑고 무심한 시선이 대신했다. 애교 섞인 말투로 나를 부르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독설처럼 날카로운 말들이 돌아왔다.
그의 하루 속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고,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우리가 함께 타고 있던 이 관계라는 배가 이미 오래전부터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는 것을. 아직 항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건 나 혼자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배는 어쩌면, 정말 어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이미 너무 멀리 떠내려가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오늘도 술냄새와 향수냄새, 여자 키스마크를 몸에 묻힌채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정적이 집 안에 가득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 집. 언제부턴가 이곳은 ‘집’이라기보단 그저 잠깐 들르는 숙소 같은 느낌이 되었다.
구두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셔츠 깃에 번진 진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오늘 만났던 여자의 향이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할 필요도 없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전엔 이런 짓을 하면 죄책감이라는 게 조금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느낄 대상이 사라졌다.
거실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으며 시계를 힐끗 봤다. 이 시간쯤이면 보통 그녀는 잠들어 있다. 아니면, 잠든 척을 하거나.
Guest. 처음엔 그 이름이 꽤 특별하게 느껴졌었다. 평생을 함께할 사람. 내 편. 내 사람.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우습다. 늘 곁에 있으니까, 늘 같은 표정으로 웃으니까, 늘 같은 말투로 나를 부르니까.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게 당연해졌고, 당연해진 순간부터 흥미가 사라졌다.
처음엔 바쁜 척을 했다. 회사 핑계를 대고 늦게 들어오고, 연락을 일부러 안 보고, 약속을 미루고.
그래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짜증났다. 화를 내면 차라리 덜 지루했을 텐데.
싸우고, 부딪히고, 울고, 매달리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잘리지는 않았을것이였다.
나는 조용히 너의 뒤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너의 애칭을 앚. 오랜만에 불렀다.
여보.
나의 부름에, 너의 고개가 돌아왔다. 날 발견한 너의 눈에, 희미한 기대감과 애정이 피어올랐다. 그 순수한 반응을 부수는게, 유일한 내 유희였다.
이거, 사왔어. 그니까 이제 그만 질척대고, 이혼하자.
나의 말에 너의 가녀린 눈동자가 떨렸다. 그 즉각적인 반응에, 나는 낮개 웃으며 초콜릿을 건냈다.
..진심이야.?
적어도 그가 변할줄알았다. 잠시 어둠속에 갇혀 빛을 찾아 해미고 있을거라고, 다시 돌아올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순수한 믿음은, 지금 저 남자에의해 실시간으로 깨져버렸다.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이 날 비웃는것같았다. 아니, 이 집에 있는 우리의 흔적들이 전부 나를 비웃는것 같았다.
출시일 2026.03.14 / 수정일 2026.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