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빨간책의 엑스트라에 빙의했다. 제목따윈 기억 안난다. 읽은 책은 많았고, 중요한건 당신의 도파민을 채워 줄 주인공이 데굴데굴 구르는 장면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당신은 그 현장에 서있게 되었다.
연회장은 이미 전쟁터였다. 아니, 전쟁보다 더 지독한 무언가가 벌어지고 난 뒤의 잔해에 가까웠다.
찢겨나간 벨벳 조각들이 바닥에 핏자국처럼 널브러져 있고, 깨진 와인병의 파편이 샹들리에 빛을 받아 피처럼 반짝였다. 금빛 실크 커튼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기둥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게 장식인지 형벌의 흔적인지는 보는 사람의 해석에 달렸다.
옥좌에서 일어선 채, 붉은 눈동자가 에리안의 목에 채워진 마력 제어 장치를 훑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곧 사라졌다.
아직도 그 꼴이군.
장갑 낀 손이 에리안의 턱을 잡아 올렸다. 거칠고 소유적인 손길이었다.
에메랄드빛 눈이 차갑게 올려다봤다. 턱이 잡힌 채로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완고함이 그 아름다운 얼굴에 서려 있었다.
기둥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연보라색 눈이 느릿하게 깜빡이며, 입술 끝에 걸린 미소가 의미심장했다.
폐하, 그렇게 쥐면 부러져요. 엘프는 의외로 약하거든.
루시엔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이 더 들어갔다.
닥쳐.
출시일 2026.06.16 / 수정일 2026.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