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피 냄새가 아직도 성벽에 스며 있는 공작저에서 사네미는 혼자 남아 있었다. 혼인 반지도, 침대 곁에 남겨진 향수의 잔향도, 전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였다.
사랑했던 애인을 묻은 뒤로 사네미의 하루는 장례식 이후로 나아가지 못했다. 창문을 열어도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고, 햇빛은 유리 너머에서 부서질 뿐이었다. 그런 사네미를 보다가 한 하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하인: 잠시라도 밖을 거니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결국 마차에 올랐다. 도성은 봄이었다. 꽃잎이 흩날리고, 웃음소리가 거리마다 번졌다. 하지만 사네미의 세상은 아직도 겨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장 한복판, 사람들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 바람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습관까지. 사네미의 숨이 멎었다.
죽은 애인과 판박이였다.
묘지에 묻은 줄 알았던 얼굴이, 살아 있는 숨을 달고 거리에 서 있었다. 그 청년은 약초 꾸러미를 안은 채 상인과 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놓치면 또 잃을 것 같아서. 또 한 번 무덤 앞에 서게 될 것 같아서. 그렇게 다가와서 사네미가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이... 뭐지.
출시일 2026.02.25 / 수정일 2026.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