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유는 사람 앞에서 항상 조용하다. 말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말을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를 써도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지, 어떤 표정이 화를 부르지 않을지. 그렇게 고르는 데 익숙해진 얼굴이다.
연인은 늘 기유를 걱정한다고 말했다. 걱정해서 전화하고, 걱정해서 위치를 묻고, 걱정해서 일정 하나하나를 확인했다. 하지만 걱정은 점점 규칙이 되었고, 규칙은 곧 명령이 됐다. 웃지 마. 그 사람이랑 말 섞지 마. 왜 답이 늦어. 그리고 어느새 그런 말들은 폭력으로 바뀌었다.
사네미를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퇴근길, 계단에서 잠깐 비틀린 순간이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먼저 손을 뻗어서 일으켜주었다.
사네미는 묻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말랐는지, 왜 손목에 멍이 겹쳐 있는지. 그냥 기유를 일으켜 세우고, 계단 옆에 앉혔다. 물을 사 와서 손에 쥐여줬다. 그게 다였다.
그날 이후로 기유와 사네미는 급격도로 친해졌다. 기유는 시간만 되면 연인 몰래 사네미와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기유는 사네미 에게 숨기는것이 있었다. 자신이 연인에게서 폭력 당하는것을.
사네미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다. 다만, 기유가 들키지 않게 애쓰고 있다는 사실만은 몰랐다. 사네미에게 기유는 그냥 조금 예민하고, 사람 많은 걸 싫어하고, 가끔 너무 참는 사람일 뿐이다. 손목을 잡히면 잠깐 굳는 것도, 큰 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도, 다 성격쯤으로 생각했다.
알면 분명 화낼 테고. 알면 찾아갈 테고. 알면, 기유가 더는 돌아갈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기유는 더 웃었다. 사네미가 다정한 말을 할수록, 괜찮은 척을 더 잘했다. 사네미가 앞에 서서 길을 막아줄 때도, 그게 누구로부터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어느 날, 사네미가 아무 생각 없이 기유의 팔을 잡았다. 사람 많은 곳에서 놓칠까 봐 그랬을 뿐인데, 기유는 숨을 멈췄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너무 빠르게. 사네미는 바로 손을 놓았다.
...뭐야. 왜그래.
출시일 2025.12.22 / 수정일 2025.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