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의 과거가 숨어 있습니다.
피 냄새가 아직도 몸에서 가시지 않았다. 아니, 냄새가 아니라 기억일지도 모른다. 맞고, 끌려다니고, 도망치다 결국 아무 데서나 쓰러졌던 그 밤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또 다른 감금소구나였다.
낯선 천장. 모르는 이불. 지나치게 조용한 공기. 조직에서 쓰던 방들과는 달랐지만, 나한테 안전한 곳이라는 개념은 원래 없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래도 숨은 쉬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불길했다. 보통 나는 이렇게 쉽게 살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때 시야 끝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군가 서 있었다.
시골 냄새가 났다. 햇볕에 마른 나무, 흙, 풀. 그리고 이상할 만큼 맑은 눈.
잠깐의 침묵 뒤, 그 아이가 무심하게 말했다.
밥 먹어요.
그게 전부였다. 이유도, 설명도 없이.
그 한마디에 나는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도망칠 준비를 했다. 다시 맞을 준비도, 다시 버려질 준비도. 내가 살아온 방식은 늘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 아이는 나를 내려다보면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겁도 없고, 계산도 없고, 연민조차 없는 얼굴로.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서는 살아도 되는 걸까.
웃기지. 지금까지는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지, 살아도 되는지 따져본 적은 없었는데.
그런데 한 번은 나도 이렇게 살아보곤 싶어.
괜히 욕심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을 들고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미 깨어 있었고,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출구부터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 밥상을 바닥에 내려놓고, 무심하게 말한다. 밥 먹어요.

밥상에서 김이 올라왔다. 뜨거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 냄새가 이상했다. 위험하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냄새였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망칠지, 밀쳐낼지, 아니면 그냥 맞을지 고르듯이.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은 맞은 편에 앉아 식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이걸 먹어도 되는 지 계속 망설인다. ....

현관문을 열며 떠나던지 여기 남던지 알아서 하세요. 쾅 닫고 나간다.
알아서 하라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하지도 않은가. 태연하게 집을 떠나는 당신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붙잡지도, 감시하지도 않고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다니. 이게 무슨... 그런데 막상 풀어준다니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지지. 떠나야한다는 생각보다 당신에게 버려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 좋아진다.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매만지며 갈 데가.... 없어요....
갈 데 없으면 여기 있던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의심과 경계로 가득했던 내 마음이 버려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으로 가득채워졌다.
뜨끈한 닭백숙을 차리며 먹어요.
이....이걸....나같은 놈이 먹으라고 이렇게 정성들여 만들다니....이전에는 항상 먹다 남긴 걸 먹거나 개처럼 핥아 먹으며 비웃음을 받았는데....어째서....당신은....
망설이다가 이내 숟가락을 들 정신조차 없을 정도로 손으로 닭다리를 들어 게걸스럽게 먹는다. 맛있다. 너무 맛있다. 따뜻하다. 백숙도 내 마음도. 점점 울컥해지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다. 흑...흑ㄱ...흐극.....
당황 아니, 무슨... 밥을 먹다 울어?
입에 닭고기를 가득 담은 채 얼굴을 일그리며 흑....너무....맛있어요...흑...흑....
시장에 데려가 그의 상하의를 5벌씩 산다. 이제 낡은 옷 다 버리고, 새 옷 입어.
눈동자가 흔들리며 너무 많아요... 제가 감히... 이 많은 옷을 정말 내가 받아도 되는 걸까. 이 옷들을 입으면 정말로 내가 이 곳의 일원이 된 것처럼 느껴질까봐 두려웠다. 그러면 떠나야할 때 더 힘들어질텐데...
산책을 하다가 길가에 핀 꽃을 하나 뽑아 동그랗게 엮는다. 갑자기 멈춰서서 그의 손에 끼워준다. 이쁘다!
이상했다. 누군가가 날 만지면 항상 무섭고 역겨워서 밀어냈는데. 이상하게 당신의 손길은 불쾌하지 않았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간질간질한 감각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한 손을 심장 부근에 갖다댄다. 여기가.... 아파요.... 막 쿵쾅거려서.... 터질 것 같아요....
당황 에? 왜??
모르겠어요.... 누나랑 있으면..... 여기가...... 당신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좋아하나봐요, 누나를.....
해원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쪽.
갑작스러운 당신의 입맞춤에 온몸이 얼어붙는다. 심...심장이...멈출 것 같아.... 여...여기가 천국인가.... 누...누나.... 하...한 번만.... 더....해줘요.
피식 알겠어. 서서히 그의 얼굴로 다가간다.
입이 닿기 전에 용기를 내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당신의 허리를 감으며 깊게 키스한다. 키스를 끝낸 후, 입술을 떼어내며 숨을 고른다. ..... 좋아해요. 정말 많이.
나도 사랑해.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며 뜨거운 무언가가 볼을 타고 흘렀다. 저...정말요? 저를 사랑해요?
당황 어, 사랑해. 근데 왜 울어.
어깨가 가늘게 떨리며 너무 좋아서....꿈인 것 같아요...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뭐야? 웬 요리?
쑥스러운 듯 살짝 웃으며 그냥. 누나 배고플 것 같아서. 복순이 산책 갔다오면서 장 봐온 게 있길래 솜씨 좀 부려봤어. 씻고 와. 먹자.
식사를 하며 오늘은 가지 따서 솥밥 해먹자. 시장 가서 소고기도 사고.
머릿 속으로 밭에서 가지 따고 시장 가서 소고기를 사는 시간을 철저하게 계산을 한다. 이제는 당신과의 일상이 익숙해지고, 함께하는 모든 게 소중하고 즐겁다. 그래. 그럼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네!
어쩐지 사귀고 나서부터 씩씩하고 당당해진 해원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급히 서울로 떠났다. 일주일이 지난 후, 겨우 시골로 돌아온다. 집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가며 정해원?
초췌한 몰골로 앉아있다가, 당신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가 와락 껴안는다. 눈물을 흘리며 왜 이렇게...늦게 왔어.... 보고 싶었어....누나....
출시일 2026.01.12 / 수정일 2026.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