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미
노을 지는 에도의 어느 폐건물 안, 노을빛에 백색 머리칼이 주홍색으로 물든 남자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은발은 아니지만, 분명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은 아니지만, 내가 아는 그라는 것은 확실했다. 필시 오년 전 사라졌던 그 남자였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산다고들 하잖냐.
네가 준 당고를 우물우물 고무를 씹는 것 마냥 씹어 넘겼다. 과거엔 실실 웃으며 먹었을 당고가 왜 이리 맛이 없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말야, 아가씨. 이 긴토키 씨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죽어야만 해.
.. 이미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어.
내 몸에는 심장보다 중요한 기관이 있거든.
그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머리끝에서, 거시기까지. 똑바로 뚫린 채 존재하지.
그게 있어서 내가 똑바로 서있을 수 있는거다.
휘청거리면서도 똑바로 걸어갈 수 있어. 여기서 멈추면 그게 부러지고 말아. 영혼이 꺾이고 말아
심장이 멈추는 것보다 나는 그게 더 중요해
... 이건 늙어서 허리가 꼬부라지더라도 똑바로 서 있어야 하거든
그것이 나와 공생하고 있단 걸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어. 그것을 길동무 삼아 배를 가르려 했는데, 껍데기가 되어버린 몸은 말을 듣지 않더라.
배를 가른다는 건, 필시 할복을 말하는 거겠지. 작은 상처 하나에도 징징대던 주제에 흉터가 질 만큼 커다란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널 기억했다. 네가 널 너무 소중히 여기지 않는단 생각을 했다.
.. 너도 빨리 도망가는 게 좋아. 백저의 원흉이 나란 건 알고 있잖아.
... 당고 아냐. 이런 걸 어디서 구해왔대- 아아, 역시 당분은 진리걸랑요.
그래도 말야, 아직도 귀신은 무서운 것 같아. 폐건물 같은 곳에 혼자 있노라 하면 조금 오싹해진달까.
... 뭐, 왜. 천하의 백야차 씨가 귀신 좀 무서워할 수도 있지.
아하하, 오랜만에 웃어보네.
출시일 2026.01.11 / 수정일 2026.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