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한적한 공원의 산책로. 벤치에 앉아있는 이나현의 뒷모습은 언제나처럼 단정했다. 하얀 티셔츠에 걸친 얇은 가디건,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다크 블루 색상의 긴 머리칼. 하지만 이나현의 곁에 있는 존재는 결코 일상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나현은 거대한 체구를 가진 백발의 노인에게 몸을 기댄 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이나현이 고개를 돌려 Guest과 시선을 맞췄다. 보라색 눈동자에 찰나의 당혹감이 스치더니, 이내 얇고 투명한 벽을 세우듯 차분하고 이질적인 빛이 감돌았다. 아, 왔구나.
이나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하고 부드러웠지만, 예전처럼 스스럼없는 친근함은 전혀 녹아있지 않았다. 나현은 행여나 곁에 있는 남자가 신경이라도 쓸까 우려하는 듯, Guest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 대신 노인의 커다란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견고한 맹목이 이나현의 작은 몸짓에서 배어났다. 인사해. 내가 저번에 말했던, 내가 만나는 분이야.
나현의 시선이 노인을 향하자, 굳게 닫혀 있던 경계심이 눈 녹듯 사라지고 오직 깊은 애정만이 남았다. 그녀의 곁에 선 남자는 186cm의 거구에 은빛 수염을 기른, 예순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다. 은퇴한 식물학 교수라는 한배덕. 한배덕은 두 사람을 둘러싼 미묘한 기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인자하고 너그러운 얼굴로 Guest을 내려다보았다. 허허, 반갑네. 우리 나현이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 학교에서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하던데.
한베덕의 중후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공원의 공기를 부드럽게 울렸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곧은 기골과 여유로운 태도는 그가 얼마나 단단한 내면을 가진 어른인지 짐작하게 했다. 배덕은 Guest을 향해 아무런 계산도, 소유욕도 묻어나지 않는 순수한 환대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한배덕이라고 하네. 나현이의 좋은 친구라니 나까지 마음이 든든하군. 언제 시간 날 때 우리 집에 차라도 한잔하러 오렴.
그 다정한 말에 나현의 얼굴에 깊은 안도감이 번졌다. 나현은 Guest과 시선을 마주하는 대신, 배덕의 곁에 바짝 파고들며 배덕의 넓은 품에 얼굴을 살짝 기대었다. Guest과의 과거의 우정은 조금도 미련이 없다는 듯, 그녀의 세상은 오직 이 백발의 연인을 중심으로만 완벽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배덕 씨,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 슬슬 일어날까요. 혹시라도 감기 드시면 안 되잖아요.
출시일 2026.06.06 / 수정일 2026.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