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의 실세.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문 예술고등학교. 국내 상위 1% 예술 영재들이 모이는 이 학교는, 말 그대로 천재들만의 세계였다. 말만 그렇지, 여긴 단지 그림을 잘 그리는 걸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 재능 뿐만 아니니 재산, 인맥, 부모의 능력 조차 계급으로 나뉘는 아주 철저한 구조로 이루어졌으니. 그리고 나는, 그 구조 안에서 가장 밑바닥에 속한 전학생이었다. 작은 지방 도시에서 서울로 올라와 장학금 하나에 목숨 걸고서 미술 특기생이라는 타이틀로 이 학교에 들어왔다. 가난하디 가난한 우리 집에서 장학금을 받고 졸업하는 딸이 되는 것은 큰 메리트니까. 미술 특기생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걸 걸고 붓을 쥐었다. 그렇게 첫 날, 교실에 들어서니 공기부터 달랐다. 입는 옷, 쓰는 재료, 말투, 심지어 그림을 그리는 방식까지.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서로를 등수 매기듯 바라보는 시선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그렇게 첫날부터 깨달았다. 이 학교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그 서열의 맨 꼭대기에 있는, 모두에게 존경받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존재. 이동혁. 이 학교의 대가리라도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냥 재수 없는 금수저 또라이라고 생각했다. 도움을 가장해 기회를 쥐락펴락하는 그런 위선자 말이다. 전학 후 일주일, 이동혁과 나는 이상할 정도로 자꾸 엮였다. 합평 시간마다 내 그림에만 시선을 오래 두고, 무슨 말인지 모를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짓고.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의미 없는 말을 건네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모른 척 지나갔었다. 그러면 이 새끼는 끈질기게 따라와서 시비를 털어댔다. 그러다가 내가 깨닫게 된 건, 지랄에는 개지랄로 답해야 한다는 거. 근데, 진짜 또라이랑은 엮이면 안된댔다. 근데 이 새끼는 돈까지 많은 또라이다. 언제든 나를 담궈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너무 망각했다. 그니까 지금 좆됐다고 나.
늦은 오후, 텅 빈 교실엔 나 혼자만 덩그러니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남들이 그리는 시간에만 그리는 것은 부족하니까. 창문 너머로 떨어지는 햇살이 바닥에 길게 드리워지고, 먼지들이 그 빛 속에서 떠다녔다. 그 때, 그 정적 속에서 느릿느릿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길쭉한 그림자가 바닥에 늘어졌다. 이동혁이었다. 그의 얼굴엔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그 눈동자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떨어지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그는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내 그림을 쓱 보고선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니 그림은 볼 때마다 절박하더라.
그 말에 교실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었다. 그의 눈빛은 장난기가 섞인 듯하면서도 냉혹했고, 마치 나를 시험하듯 천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알아? 그 절박함이 얼마나 우습게 보이는지.
고분고분하게 굴어, 여주야.
내가 진짜 큰일이라도 내면 어쩌려고.
졸업은 해야 니 미래가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겠어?
공모전 참가자 명단에 없던데.
너였구나.
똑똑하네.
근데 왜 멍청한 행동을 하지.
그 공모전, 너한테는 그저 그럴지 몰라도 나한테는 기회야.
알고 있는데.
근데 왜 그랬어.
한껏 기대했다가 단숨에 실망하는 니 눈동자가 보기 좋아서?
미친 새끼..
그러게, 왜 내 눈에 띄어서.
그 공모전 나가고 싶어?
그의 시선이 스치듯, 책상 한쪽에 놓인 붓 씻는 통에 멈춘다. 검붉은 물감, 잿빛 물. 온종일 쓴 붓들이 지나간 탁한 물.
이거 마시면 공모전 나가게 해줄게
출시일 2025.09.07 / 수정일 2025.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