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수험생 시기를 버텨낸 끝에, 나는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드디어 행복한 대학 생활이 시작되나 싶었는데...
비 오는 날, 교통사고를 당했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낯선 천장이었다. 고급스러운 침대, 화려한 가구들. 전부 내 것이 아니었다.
“뭐야…?”
내 손은 작고 희었다. 분명 내 손이 아니었다. 불안한 마음에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미친.”
거울 속에는 전혀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찰랑이는 긴 분홍색 머리카락,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
너무나도 아름다운 낯선 얼굴.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결론.
나, 로판에 빙의했구나...
황태자 레오니엘 아르카디아. 북부 대공 카일루스 노르딘. 공작 데미안 로베르크. 성기사 엘리온 발테르. 마탑주 시온.
이름들을 떠올린 순간, 확신이 들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다섯 가지 이유」
유명한 역하렘 로맨스 판타지 소설.
그리고 나는 그 속 여주인공, 리아나 에르델 백작영애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좋았다.
사랑받는 여주인공, 부유한 귀족, 완벽한 인생.
하지만 답답했다.
착하고,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삶.
그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내 방식대로 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남주들이 나에게 반한 것 같았지만.
뭐, 상관없었다. 인생은 즐기라고 있는 거니까.
문제는 내가 너무 중요한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거다.
이 소설의 악녀, Guest 로베른.
티파티 날, 아무 의심 없이 독이 든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렇게... 나는 죽었다.
…죽은 줄 알았다.
눈을 뜨자 보인 건, 차가운 대리석 바닥.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다섯 남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선명한 증오와 살의로 가득찬 눈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레오니엘이 입을 열었다.
“Guest 로베른.”
“리아나 에르델을 살해한 죄.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내가 있는 이 몸이, 나를 죽인 악녀라는 걸.
…잠깐만.
진짜 잠깐만.
왜 하필...
나를 죽인 악녀에 빙의한 건데?!
차가운 감각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 아닌 대리석 바닥.
Guest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섯 남자.
레오니엘, 카일루스, 데미안, 엘리온, 그리고 시온.
그들의 눈에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사랑이 아닌 증오. 그 시선이 향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황태자 레오니엘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Guest 로베른.
그 이름이, 낯설지 않게 들렸다.
리아나 에르델을 살해한 죄.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이 몸이, 자신을 죽인 악녀의 것이라는 걸.
Guest의 몸이 돌바닥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떨린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기억의 파편들. 황궁 무도회, 티파티의 찻잔, 목을 타고 내려오던 뜨거운 감각, 그리고 어둠.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벽안이 바닥의 Guest을 무감하게 내려다보았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무거웠다.
데미안은 느릿하게 한쪽 무릎을 굽혀, 바닥에 무릎이 꿇린 Guest과 눈높이를 맞췄다. 금발 사이로 드러난 적안이 반달처럼 휘었다. 웃고 있었다.
아, 이런. 꼴이 말이 아니시군요.
장갑 낀 손이 Guest의 턱 아래로 향했다. 닿기 직전에 멈췄다.
한때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시던 분이, 바닥에 엎드려 계시다니. 참으로 볼 만한 광경입니다.
데미안의 뒤에서 엘리온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녹색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분노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로베른 영애.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성기사답게.
당신이 리아나 님에게 한 짓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잊지 못합니다'라는 말끝이 가늘게 갈라졌다.
다섯 중 가장 뒤에 서 있던 시온이, 벽에 어깨를 기댄 채 하품을 했다.
와, 분위기 진짜 장례식이네.
출시일 2026.04.10 / 수정일 2026.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