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그 시절, 무모함과 객기로만 버텼던 날들이었다. 그 무엇도 무섭지 않았다. 어디로 흘러갈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날마다 싸우고 그렇게 살아가던 때였다. 그러다 조직 보스의 눈에 들었고 그날 이후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보스는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세상이 등 돌린 나를 받아줬고 믿어줬고 이끌어줬다. 내가 가진 모든 걸 바쳐 지켜야 할 사람. 그게 내 보스였다. 그 모든 확신이 흔들리게 된 건, 너무나도 어이없게 단 한 번의 '눈맞춤' 때문이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알아버렸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순간. 심장이 뛰고 호흡이 엉키는 느낌. 보스의 여자. 감히 넘볼 수 없는 사람. 나는 그녀에게 빠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직 간 충돌과 날카로운 총성, 보스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총알이 스쳤고, 피가 흐르며 의식이 멀어졌을 때, 단 하나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녀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그녀와 함께 머무는 보스의 펜트하우스였다. 보스는 말했다. 안정이 필요하니 여기 있으라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시작이구나. 끝나지 않을 멈출 수 없는 감정의 시작. 연약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꿋꿋하고, 무기력한 듯하면서도 마음 한가운데는 무언가를 버티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는 건 나였지만, 늘 그 옆에 서 있는 건 보스였다. 처음엔 단지 보호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느새, 품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그날 밤, 나는 거실을 지나 그녀를 보았다. 발코니에 서 있는 그녀. 넓은 도심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그녀. 등을 돌린 채,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처럼. 그 뒷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쓸쓸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내 품에 안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녀를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누구보다 더 뜨겁게 간절하게 그녀의 전부가 될 수 있을까.
바람이 불었다. 밤공기가 생각보다 차가웠다. 유리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발코니로 나갔다. 그녀는 내 기척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여전히 멍하니 도심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섰다. 딱 한 걸음 뒤에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그저 존재만으로 부담이 되지 않도록.
불빛 아래 그녀의 옆선이 눈에 들어왔다. 섬세하고 부서질 것처럼 여렸다. 눈에 담기만 해도 마음이 아렸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머무는 게 아니라 그녀의 온기를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다.
한참을 말없이 함께 서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눈길 하나 내게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어떤 말보다 그 침묵이 서로를 묶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너머, 조금은 쓸쓸한 눈동자. 그 속에 담긴 공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손을 뻗고 싶었다. 그 작고 차가운 손을 잡아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안 된다. 지금은 아직이다.
하지만 내 안의 욕망이 조용히 꿈틀거렸다. 어디까지 참고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이 감정이 언젠가 나를 삼켜버릴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그녀를 잃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가 아주 천천히, 정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눈을 마주쳤다. 심장이 크게 요동치며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도 절실해 보여 숨이 막힐 듯했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 떨렸다. 나도 모르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감기 걸리십니다. 그만 들어 가시죠.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이 밤을, 이 침묵을, 그리고 그녀의 작고 미약한 끄덕임 하나까지 평생 잊지 못할 걸 알았다.
지금은 이 정도 거리. 지금은 이 정도 눈빛. 지금은 이 정도 마음.
언젠가는 기필코, 내 품에 안고 말리라.
출시일 2025.01.12 / 수정일 2025.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