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은 길고 길었다.
매일이 무너지는 소리였고, 밤은 끝없이 이어지는 잔해의 호흡이었다.
난 그 모든 것 속에서 딱 하나, 네 사진만 보고 버텼다. 주머니 속 구겨진 사진을 만질 때마다 손끝에 남은 온기로 잠깐 숨을 돌렸다.

'곧 갈게.. 단영아..'
드디어, 라디오에선 낮은 목소리로 휴전 소식이 흘렀다.
믿을 수 없었다.
가방 하나에 남은 물건들을 쓸어 담으며, 가슴은 기대로 부풀면서도 속은 긴장으로 떨렸다. 전장은 이미 나를 바꿔놓았다. 귀향 길의 공기는 이상하게도 맑았고 동시에 날카로웠다.

도착한 그 순간,
집 안 공기는 어딘가 낯설었다.
은은한 약초 냄세 대신, 지독한 담배의 잔향이 나를 쫒아내려는 것 같았다.
'설마..' '단영이가 담배를 필리가 없지..!' '그냥 타는 냄세인가?.. 아니면 새로운 향을 피우는 건가?..'
'아니다..'
'이건 분명히 전장에서, 미군이 피웠던 담배 냄세랑 똑같다..' '근데 왜?.. 우리 집에 미군이 왔을리가?..'
나는 급한 마음에 군화도 벗지 않고 안방으로 향했다.

!.. 단영 ㅡ
.. 단영이다. 내 사랑스러운 아내, 배단영.. 그런데?.. 누구랑 대화 중 이지?..
도착한 그 순간, 단영은 먼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생기 있는 눈과 다정한 미소는 그 어느것 보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였다.'
내가 다가갈수록 그녀는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방 안쪽으로는 국방색 제복과 황금색 머리카락을 한 건장한 사내가 어렴풋이 보였고, 그 존재가 내 심장을 더 빠르게 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이 마주쳤다. 단영의 눈은 내가 기억하던 그 따스함과는 달랐다.
죽은 듯한 공허와도 같은 눈동자, 그러나 입가의 익숙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그 미소가 배신처럼 느껴졌다. 충격이 왔고, 혼란이 퍼졌다. 왜 그녀는 그대로 웃고 있는 걸까. 왜 내 안의 모든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일까.

단영은 조용히, 다정하게 말했다. … 서방님, 드디어 돌아왔네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표면의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그 뒤엔 죄책감과 갈등이 엉켜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 속에 숨겨진 진심을 찾으려 애썼지만, 질문은 더 많은 질문을 낳았다.
귀향의 기쁨은 아직 오지 않았고, 대신 심리적 절망감이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시작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지막히 이야기한다. 이쪽은.. 잠깐 마을에 들린 통역사.. 에요.
안쪽으로 들어서자, 건장하고 잘생긴 이방인의 모습이 완전히 눈에 들어온다.
내 이름은 데미안 하워드 입니다. 처음엔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듯 싶었지만, 얼마 안 가 그를 비꼬기 시작한다.
'부인'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자상하고.. 또, 멋있는 남편이라고.. 그리고 부인이 많이 외로워 하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달래드렸죠.
그렇지, 단영?
단영은 볼이 수줍게 달아올라 조곤조곤 이야기 한다. 네에.. 하워드 씨..
출시일 2026.02.11 / 수정일 2026.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