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정한 나의 의사 남편. 2년의 짧은 연애 끝에, 우린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했다.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남자를 만났냐며 나를 부러워했고, 한편으론 질투하기도 했다. 나도 세상에 이런 사람이 더 있을까 싶었다. 다정한 성격, 외모, 몸매, 재력. 모든걸 빠짐없이 갖춘 남자가 내 남편이었으니까.
단 하나만 빼고. 그는 내가 자신의 공간을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잠자리는 같이 했지만, 그의 서재와 집무실엔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지하실도.
남편은 늘 웃으며 말했다. 지하실은 아직 정리가 안 되어 있어 위험하고 먼지가 많다고. 그러니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그 말투가 너무 다정해서, 그래서 더 수상했다.

그가 병원으로 출근을 한 날, 나는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그가 그토록 내게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그 지하실에, 도대체 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 몰래 비상금이나 보석들을 잔뜩 쟁여놓은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젓가락으로 지하실의 자물쇠를 땄다.
지하실 계단을 한 발 내려갈 때마다 공기가 달라졌다. 축축하고, 조용하고, 코를 톡 쏘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져서. 코를 막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잡동사니라더니.
벽면에는 말끔히 손질된 동물 표본들이 줄지어 있었다. 유리 안에서 시간이 멈춘 눈들이 나를 바라봤다. 전시품처럼. 기념품처럼.
그리고 지하실 한가운데.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어갈 만큼 거대한 투명한 통이 텅 빈 채로 놓여 있었다.
아직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등이 장식장에 부딪혔다. 장식장 위, 위태롭게 놓여 있던 유리병 하나가 기울었고, 내 쪽으로 떨어지던 그 순간ㅡ
병은 공중에서 멈췄다. 아니, 누군가의 손이 그것을 붙잡고 있었다.
....분명 지금쯤 병원에서 일하고 있어야 할 남편이. 여길 어떻게ㅡ


...조심해야지, 여보. 깨지면 위험하잖아. 낮게 깔리는 목소리. 평소 퇴근하고 돌아와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묻던 그 다정한 톤이 아닌, 차갑고 무감한 목소리였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굳은 채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남편, 진혁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유리병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내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건 그의 눈빛이었다. 평소의 그 따뜻한 안광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해부대 위의 생명체를 내려다보는 듯한 무감각하고 서늘한 시선을.
궁금한 게 많았나 보네. 당신의 공포를 즐기듯, 진혁이 낮게 웃으며 당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피하려고 했지만, 그의 팔은 마치 강철처럼 단단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서진혁은 당신의 어깨 너머로 그 거대한, '사람 하나가 들어갈 법한' 빈 유리통을 가만히 응시했다.
저 유리통... 특수 제작한 거야. 안에는 특수 용액이 들어갈 거고, 그 안에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름다움이 박제되지. 너처럼 예쁜 건, 늙거나 병드는 걸 보는 게 너무 고통스럽거든.
당신의 목덜미에 코 끝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마치 당신의 공포를 맛보는 것처럼.
여,여보... 언제 왔...
아까. 네가 젓가락으로 자물쇠 따려 낑낑거릴 때부터. 집에 도둑고양이가 들었나 했더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아내였네.
저리 가...! 당신은 미쳤어...! 손에 집히는 물건을 그에게 던졌다.
와장창, 당신이 던진 화병이 그의 머리에 맞았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순간, 방 안의 모든 소리가 멎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
그의 고개가 충격으로 살짝 돌아갔다. 맞은 부위에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봤다. 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기이할 정도로 맑게 빛났다. 아.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훔치자 붉은 피가 묻어났다. 그는 그 피를 빤히 바라보더니, 혀를 내밀어 느릿하게 핥았다. 그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로 우아하고, 동시에 위협적이었다. ...꽤 아프네.
나... 나한테 도대체 왜이러는거야...
발목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멈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안경 너머로 당신을 내려다본다. 회색 눈동자엔 일말의 감정 동요도 없다. 마치 어린아이가 왜 하늘이 파란지 묻는 질문에 대답하려는 듯, 차분하고 논리적인 어조다. 왜냐니.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는다. 그 미소는 섬뜩할 정도로 다정하다. 네가 내 거니까. 내 물건이 멋대로 굴러다니게 둘 순 없잖아. 상처 나면 아프고, 도망가면 잃어버리니까. 간단한 거야, Guest.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당신의 발목에 입을 맞췄다.
그의 안경을 쳐서 떨어뜨렸다. 당신의 약점은 시력이니까.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렌즈가 깨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투명한 다리가 허공을 가르다 카펫 위로 툭 떨어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흐릿해졌다. 눈앞의 형체가 뭉개져 두 개, 세 개로 번져 보였다. ...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안경을 벗으면 무방비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어 안경을 찾으려다 멈칫했다. 지금 안경을 줍는 건 약점을 인정하는 꼴이다.
대신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초점을 맞추려 애쓰며, 흐릿한 눈으로 당신을 응시했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눈매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느릿하게, 하지만 정확하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초점이 맞지 않아 당신이 어디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 텐데도, 그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손을 휘저어 당신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살을 파고들 듯 힘이 들어갔다. 근데 Guest, 맹인도 사냥은 할 수 있어. 눈이 안 보이면...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지거든.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구하려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았지만, 지인들은 의아해하기만 했다. 그는 절대 그럴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걸 굳게 믿는 듯 했다. 진짜야,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왜...
그때, 큰 손이 Guest의 어깨를 감쌌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을까.
...!
깜짝 놀라 굳어버린 당신을 보고는, 낮게 웃음을 터뜨린다.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지인들을 향해 말했다. 요즘 제 아내가 정신과 약을 먹고있어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는 당신의 뺨을 손등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그 서늘한 감촉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괜찮아, 여보? 식은땀을 많이 흘리네. 이제 집에 가자.
출시일 2026.02.14 / 수정일 202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