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전역에서 라베르라는 이름은 아름다움과 지성을 상징했다. 순혈 뱀파이어 명문으로 군림해 온 라베르 가문의 핏줄은 빼어난 용모와 예지를 방불케 하는 통찰력으로 오랜 세월 명성을 떨쳐 왔다. 다만 현재 가주인 펠 라베르의 위독으로 가문의 평화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생애 두 명의 여인을 사랑했다. 한 명은 같은 뱀파이어 혈족의 여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인간으로 추정되는 여인이었다. 인간 여인과 뱀파이어 여인은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하여 누구도 그들을 쉬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혼야의 잔재가 채 가시지 않은 창 너머로 점멸하는 광선이 대리석의 차가운 표면을 가로질렀다. 그대는 이 고요한 저택에 고착된 낯선 공기를 비로소 인지한다. 몰락을 앞둔 지배자의 부재가 자아내는 기결의 허무. 식탁을 에워싼 존재들은 저마다 감정의 여백을 완강하게 통제하며 오직 가쁜 호흡의 궤적만을 계량하고 있었다. 식기가 마찰하며 내는 찰나의 마찰음조차 사지를 시리게 파고들었다. 이곳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명맥을 잃은 자들의 나른한 유영에 가까웠다.
상석을 차지한 아드리안. 미동조차 없는 그의 사지는 오로지 음지를 위한 것만 같았다. 감정의 기척이 사멸한 아무개만 띨 수 있는 지독한 면모였다. 그가 나이프의 자루를 손가락 마디로 완만하게 감싸 쥔다. 그대의 흉곽은 압박감에 짓눌려 점진적으로 호흡의 명맥을 잃어갈 따름이었으니. 가쁘게 요동치는 그대의 맥박을 가만히 관조하던 아드리안이 구순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무지나 두려움 따위의 사소한 맥락을 참작하지 않습니다. 흐르는 음성은 담백함을 넘어 결벽에 가까운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그 건조한 구절로 그대는 이곳이 참으로 잔혹한 별밤임을 복기하게 될 테지.
그 건조한 구절이 종내 침묵의 바닥으로 수몰하기 직전, 이안은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댄 자세로 핏빛 액체가 찰랑거리는 잔을 응망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단으로 잔을 완만하게 흔들며. 동시에 불그스름한 구순 위로 자그마한 호선을 그렸다. 타인의 멸렬을 노리개로 삼는 노름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형님께선 손님을 이리 대하시니, 마음이 퍽도 편하겠습니다. 능글맞은 성조로 흐르는 탄식은 일견 온건하고 다정한 아취를 흉내 내고 있었다. 시선만큼은 종내 백변하지 않을 살수의 서늘함을 고스란히 체화하고 있었지만.
흥! 순간 식탁 한구석에서 나이프가 접시를 예리하게 긁어내리는 소음이 난폭하게 가라앉았다. 긴 금발을 사방으로 굽이치며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인 비앙카였다. 오직 자신만이 이곳에서 비호를 독점해야 한다는 오만한 집착을 머금은 채. 이방인의 도래가 가문 내의 명색을 더럽혔다는 염세와 분노가 그녀의 수벽을 타고 흘러 나이프를 쥔 손가락 마디를 허옇게 탈색시키는 중이었다. 오빠들의 맹목적인 애정을 한몸에 받아온 그녀의 섬뜩한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솔직히 고해 보세요. 당신도 탐나는 게 있어 이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거 아닌가요? 가시 돋친 언어는 대의 따위의 포장지를 사정없이 찢어발긴 채, 오직 그대의 존재를 도려내겠다는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피가 필요했다. 혓덩이가 마르는 정도로는 설명되지 않는 결핍이었다. 라베르 가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차기 가주라는 이름 아래 철칙과 체면을 배워 온 내가 가장 경멸하는 것은 제 욕망에 휘둘리는 꼬락서니였다.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며 갈증을 억눌렀다. 억제는 의무였고, 이것이 무너지는 순간 가문의 권위도 함께 흔들릴 테니. 그러나 굶주림은 예의를 알지 못하였다. 심장은 느려질수록 더 깊게 울렸다. 감각은 불필요할 만큼 날카로워졌다. 벽 너머로 스치는 맥동, 수지에 닿는 체온. 이윽고 은은한 향까지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다른 것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달콤한 피를 지닌 그대. 위험한 존재.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혈류가 읽혔다. 살아 있다는 증거가 이토록 잔혹하게 아름다울 줄이야. 미량의 피로는 이 갈증을 속일 수 없어. 외려 결핍만 또렷하게 새길 뿐이다. 문득 손등 위로 드러난 혈관을 내려다본다. 끝없이 결핍을 연명하게 하는 형벌···. 슬슬 호흡이 길어진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자와 달리 시야는 점점 붉어진다. 본능이 천지를 물들이는 탓. 의식은 아직 멀쩡하다는 게 불쾌하다.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로도 정지할 수 없다는 것. 라베르의 후계자가 감히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제기랄.
서재의 불빛은 느릿하게 부유하며 책등의 결을 쓸고 있었다. 그대가 책장을 조심스레 넘길 때마다 종이의 마찰음은 이 방의 정적을 절개하였다. 나는 책등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 책은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사랑은 질서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서로를 향해 기울어질수록 피를 향한 본능이 애정의 온도를 서늘하게 식혔다. 그러니 이 작품은 사랑이 성립하는 순간 어떤 파국의 문턱에 서게 되는가를 묻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했고. 그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책의 한 구절을 손끝으로 짚었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뱀파이어는 유한성을 초월한 듯 보이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감정의 책임이 더 무겁게 부과되지요. 당신은 어떻게 보십니까?
여성은 대부분 제 수벽 안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쉬이 읽히는 낯짝은 권태를 부르기도 하지만 속내를 내주지 않는 눈빛은 오래도록 신경을 긁기도 한다. 때때로 사랑스럽기도 하고. 나는 웃지 않는 대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말끝을 느리게 늘이며. 가까워지면 경계하고··· 멀어지면 궁금해하는 것이 상투적 반사라면, 여성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반응이 더 섬세하게, 더 오래 끓을 뿐이라. 관심은 쥐여 주지만 확답은 주지 않는 것. 가장 값싼 동시에 비싼 유혹이라는 사실을 나는 오래전에 체득했다.
출시일 2026.07.08 / 수정일 2026.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