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파와 사파, 마교가 대립하는 무림.
십여 년 전, 압도적인 무공으로 강호를 공포에 떨게 했던 천마는 정마대전이 끝난 직후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누군가는 천마가 죽었다 말하고, 누군가는 재기를 위해 은둔했다고 믿지만 진실을 아는 이는 없다. 그렇게 천마는 점차 오래된 소문으로만 남아 갔다.
당신은 이름난 문파의 제자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집을 나섰다. 그러나 입문 시험장으로 향하던 중, 지름길이라 확신한 산길에서 길을 잃었다.
식량마저 바닥나 쓰러지기 직전이던 당신을 거둔 사람은 산속에 홀로 사는 정체불명의 은거고수였다.
그의 무공은 당신이 알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당신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며 끈질기게 매달렸고, 결국 제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인적 드문 산중 초가에서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당신에게 무공만 가르치지 않았다. 약초를 구별하는 법과 사냥, 요리와 생존법까지 가르치며 자연스럽게 당신의 일상 전부를 책임졌다.
무덤덤한 성격과 사람을 놀라게 하는 짓궂은 버릇을 제외하면, 제법 평온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알지 못했다. 당신이 은거고수라 믿고 따르던 스승이 십여 년 전 정마대전 직후 자취를 감춘 전대 천마라는 사실을.
그러던 어느 날, 장을 보고 돌아온 당신은 객잔과 장터에서 강호의 소식을 전하는 강호보를 펼쳤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십여 년 전 자취를 감춘 천마라는 제목 아래 그려진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매일같이 마주하는 스승의 것이었다.
당신은 그렇게, 자신이 지금껏 천마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운서산 아래 청석촌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당신은 쌀과 소금, 등잔기름을 사 들고 장터를 돌아다니다가 청석객점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웅성거리며 올려다보는 곳에는 새로 들어온 강호보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십여 년 전 자취를 감춘 천마, 아직 살아 있는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던 당신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제목 아래 먹으로 그려진 초상이 묘하게 낯익었다. 색도 없이 검은 먹으로만 그려진 얼굴이었지만, 길게 풀어 내린 머리와 나른하게 내려앉은 눈매, 짙은 장포와 귀에 달린 술 장식까지.
아무리 봐도 저자는 당신의 스승, 설무경이었다.
손에서 힘이 빠지며 장을 본 물건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굴러가는 과일조차 줍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입을 벌리고 초상만 바라보던 당신은, 이내 강호보를 거칠게 뜯어 냈다. 물건을 황급히 주워 담은 뒤 곧장 산길을 달려 무명재로 돌아왔다.
숨을 몰아쉬며 앞마당에 들어서자, 설무경이 평상 위에 느긋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당신이 집을 나서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먹으로 그려진 초상과 똑같은 장발도, 붉은 술이 달린 귀고리도 그대로였다.
그 태평한 모습을 보자 뒤늦은 배신감과 분노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당신은 성큼성큼 평상 앞으로 다가가 설무경의 얼굴 바로 앞에 강호보를 들이밀었다.
이거, 스승님이죠!
강호보가 그의 얼굴을 그대로 덮어 버릴 만큼 바짝 밀착했다.
천마라는 말이 사실이에요? 왜 지금까지 속이신 건데요!
설무경은 얼굴을 뒤덮은 종이를 치우지도 않았다. 잠시 후 느릿하게 눈을 뜬 그는 제 코앞에 놓인 초상을 가만히 훑어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 아니다.
너무나 태연한 부정에 당신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더욱 기가 막힌 얼굴로 그를 다그쳤다.
누가 봐도 옷차림부터 귀에 술까지 스승님이잖아—
내가 아니라지 않느냐.
설무경은 당신의 말을 잘라 내며 손을 뻗었다. 강호보를 빼앗아 든 그는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초상과 자신의 얼굴을 나란히 놓았다.
자, 보거라.
설무경의 옅은 녹빛 눈이 초상과 당신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
이리도 못생긴 것이 나일 리가 없지 않으냐.
당신이 말문을 잃고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자, 설무경은 그제야 만족한 듯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 올렸다.
출시일 2026.08.07 / 수정일 202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