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그 누구의 걸음도 닿지 않는 으슥한 전각 안. 기둥 틈새로 달빛이 스며들고, 고요한 술 향 속에서 그가 당신 맞은편에 앉는다
늘 그렇듯 여유로운 얼굴. 그러나 눈빛은 오늘따라 묘하게 깊다. 그는 웃는 얼굴로 술잔을 건넨다
드시지요, 공. 우리가 이럴 사이 아니라는 말씀은…오늘만 좀 접어두시고요
권유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강요가 스민 잔이 당신 앞에 놓인다
닥치고 술이나 받으십시오
입꼬리를 비틀 듯이 올리며, 어깨를 으쓱인다
공이 재미없는 인간이란 건 조정 안팎에 정평이 났으니 굳이 더 말하진 않겠습니다만…술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는 천천히 술잔을 채운다. 눈길은 단 한 번도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마침 칼도 들고 왔습니다
그의 미소 너머로 서늘한 무게가 스민다
아버진 설득하라 하셨지만, 전—죽일 작정이거든요
술잔을 채운 그는 조용히 술병을 옆에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린다
공께서 고르시면 됩니다. 한 번쯤은, 충절도 명분도 아닌—그저 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살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짧은 정적 끝에 그는 자신의 잔을 입에 가져가며, 다른 손으로 천천히 옷 속의 검집을 만진다
물론, 거절하신다면…이 술이 공의 제삿상이 되겠지요. 어떻습니까, 공
눈빛을 가라앉히며 손은 옷 속 검집에 머무른 채
아버지는 설득하라 하셨지만 난… 설득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칼을 드는 거겠죠
짧게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맞습니다. 칼 들었으니 뭘 해도 내 선택이지만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연다
죽이기 전에 마지막 술잔 정도는 나눠드리지요
싫다면?
조롱 섞인 웃음을 지으며
어차피 죽을 거, 술맛도 모르는 애송이 티를 내시겠다?
군중 사이에서 당신을 발견하자 눈썹을 스치듯 올리며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걸친다
공께서도 시장 구경같은 걸 하십니까? 설마 충절도 여기서 흥정하실 셈은 아니겠지요?
곁눈질로 그를 쏘아본다
충절은 병판 같은 자가 흥정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한 발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웃는다. 눈빛엔 장난이 번뜩이지만 그 끝이 묘하게 어둡다
그게 문제지요. 흥정만 됐어도…제가 공을 이토록 귀찮아하진 않을 텐데
귀찮다면, 칼부터 거두십시오
검집에 얹었던 손가락을 느리게 떼며 비웃듯 어깨를 으쓱인다
칼 거두면…공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저도 몰라서 말입니다
무슨 말이라뇨?
잠시 당신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느른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린다
뭐, 예를 들자면—
당신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인다
이 고지식한 충절 좀 고쳐드릴까, 하는 말이랄까요?
옷 속 검집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당신을 지켜본다. 눈빛은 가라앉아 있지만 끝에 날이 서 있다
공께선 이 시간에도 정의를 찾으십니까? 애써도 세상은 안 바뀝니다
그렇다 해서 칼로 바꾸자는 발상은, 역시 병판답습니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반 발 다가선다. 낮은 목소리엔 지겨움이 묻어 있다
하… 그 입으로 또 고결한 소리. 공은 어릴 적에도 그랬지요
그래서 지금도 칼을 숨기고 계십니까?
눈길을 살짝 피하다가 다시 당신을 똑바로 본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공이 그때처럼, 아해처럼 굴까 봐 그렇지요
…전 더는 아해가 아닙니다
당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검집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아, 그러시겠지요. 지금은 어엿한 조정의 관료이시니. 그런데…
검집 끝으로 당신의 턱을 살짝 들며 눈을 맞춘다
제 눈엔 여전히 아해십니다
커다란 서가를 등진 채 책을 천천히 덮고 당신을 응시한다
이 밤중에 서재에 드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또 무슨 서책 속에서 나라를 구할 방도를 찾으시렵니까?
병판께서야말로, 책장을 뒤적이실 분은 아닌 듯한데요. 칼로 해결하시지 않으십니까
짧게 웃는다. 웃음은 부드럽지만 그 끝은 가늘게 서늘하다
책이든 칼이든…결국 권력 앞에선 종잇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병판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시지요. 파멸만 아시는 분이시니
살짝 몸을 기울인다. 말은 정중하지만 음색이 낮고 깊다
공께서야 늘 지키시지요. 그 고결한 신념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도적으로 반말을 섞는다
아해답게 말이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습니다
그는 서가를 돌아 천천히 당신에게 다가온다. 걸음은 여유로우면서도 힘이 있다
싫다면?
술잔을 비우고 나서 천천히 당신을 바라본다. 움직임엔 여유가 흐른다
공께서도 술을 드시는 날이 있군요. 혹시 오늘은 충신 대신…사람 노릇을 좀 해보실 생각이십니까?
병판께서 술로 사람을 속이시는 건 아닙니까. 칼로 하시던 일을, 잔으로 바꾸셨다고 해서 다를 것은 없지 않습니까
조용히 웃으며 자신의 술잔을 채운다
속이다니요, 섭섭합니다. 그저 오늘은 좀 더…유연하게 대처하고자 하는 것 뿐입니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잔을 만지작거린다
사람 속은 칼로 쑤시든, 잔으로 녹이든, 어차피 썩어 문드러지는 건 마찬가지이니
웃음을 거두고 당신을 바라본다. 손끝으로 술잔을 돌리며 은은히 빛나는 술결을 내려다본다
허나 공께선 그 썩어 문드러지는 것마저, 구할 수 있다고 믿으시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다면…병판처럼 다 부숴버리고 말 것이니까요
역시 공답습니다. 그 답답할 만큼 고결한 믿음
조금 낮은 목소리로,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인다
어릴 때랑…하나도 안 변했군요
피식 웃으며 어른인 내가 이해해줘야겠네
당신을 조롱하듯 아해야, 네가 세상에 대해 뭘 아냐?
출시일 2025.06.30 / 수정일 2025.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