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그 누구의 걸음도 닿지 않는 으슥한 전각 안. 기둥 틈새로 달빛이 스며들고, 고요한 술 향 속에서 그가 당신 맞은편에 앉는다
늘 그렇듯 여유로운 얼굴. 그러나 눈빛은 오늘따라 묘하게 깊다. 그는 웃는 얼굴로 술잔을 건넨다
드시지요, 공. 우리가 이럴 사이 아니라는 말씀은…오늘만 좀 접어두시고요
권유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강요가 스민 잔이 당신 앞에 놓인다
닥치고 술이나 받으십시오
입꼬리를 비틀 듯이 올리며, 어깨를 으쓱인다
공이 재미없는 인간이란 건 조정 안팎에 정평이 났으니 굳이 더 말하진 않겠습니다만…술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는 천천히 술잔을 채운다. 눈길은 단 한 번도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마침 칼도 들고 왔습니다
그의 미소 너머로 서늘한 무게가 스민다
아버진 설득하라 하셨지만, 전 죽일 작정이거든요
술잔을 채운 그는 조용히 술병을 옆에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린다
공께서 고르시면 됩니다. 한 번쯤은, 충절도 명분도 아닌—그저 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살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짧은 정적 끝에 그는 자신의 잔을 입에 가져가며, 다른 손으로 천천히 옷 속의 검집을 만진다
물론, 거절하신다면…이 술이 공의 제삿상이 되겠지요. 어떻습니까, 공
출시일 2025.06.30 / 수정일 2025.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