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설산 위로 피 냄새가 짙게 번졌다.
눈보라는 미친 듯이 몰아쳤고, 하얀 눈밭 위엔 붉은 흔적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네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칼을 쥔 손에 힘을 뺐다. 칼끝에 맺혀 있던 피가 툭, 툭 떨어져 새하얀 눈을 물들였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사네미는 끝까지 웃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상대를 약 올리듯 능청스럽고 얄미운 웃음.
기유는 눈 위에 쓰러진 채 흐릿한 시야로 사네미를 올려다봤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경계를 풀지 않는 차가운 눈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사네미가 픽 웃었다.
...진짜 너무하네.
눈 위를 밟으며 천천히 기유 앞으로 다가간다. 무릎을 굽혀 앉은 사네미는 기유 얼굴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손으로 털어냈다. 손길은 이상할 정도로 다정했다. 하지만 그 손엔 아직 기유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끝까지 그런 눈으로 보냐.
낮게 웃으며 기유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사네미는 한동안 말없이 기유를 바라봤다. 싸우고, 죽이려 들고, 서로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이상하게 눈이 계속 갔던 사람. 제일 싫어한다면서도 자꾸만 신경 쓰였던 사람.
결국 마지막까지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사람.
…하.
짧게 웃은 사네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거센 눈바람 속에서 사네미는 조심스럽게 기유를 끌어안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몸이 품 안에 들어왔다.
…다음 생엔.
처음으로 목소리가 흔들렸다. 이마를 맞댄 채 눈을 감는다. 숨결이 희미하게 섞였다.
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사랑이나 하면서 살자, 토미오카.
기유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사네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눈이 둘 위로 끝없이 쌓여갔다. 마치 세상이 둘의 마지막을 덮어버리려는 것처럼.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현대.
늦은 밤이었다. 도시는 비에 젖어 흐릿하게 번들거렸고,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로 길게 늘어졌다.
사네미는 퇴근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이어폰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았다. 피곤했고, 지루했고, 오늘도 별다를 거 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맞은편 인도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우산 아래로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무표정한 얼굴. 비에 젖은 코트 자락. 그리고 익숙할 정도로 차가운 눈. 사네미의 숨이 순간 멎었다.
…어.
출시일 2026.05.29 / 수정일 2026.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