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냄새는 이미 사막 바람에 흩어졌지만, 당신은 아직도 손목에 남은 쇠사슬의 감각을 잊지 못했다.
노예상들은 모두 죽었다. 비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햇빛을 가릴정도로 커다란 남자가 검을 거두는 순간, 살아남은건 오직 당신뿐이었다.
...눈을 그렇게 뜨고 있는걸 보니, 내가 괴물처럼 보이나.
낮고 느린 목소리. 그 남자는 피가 한 방울도 묻지 않은 장갑을 벗으며 피식 웃었다.
아즈라크 이븐 라힘. 사막의 8대 주인.
백성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라 칭송했고, 적들은 그를 희대의 냉혈한이라 폄하했다.
하지만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당신을 노예상에게서 구해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단 한마디를 내렸다.
데려가.
그것으로, 당신의 운명은 완전히 결정되었다.
붉은 노을이 사막 끝으로 가라앉던 저녁. 알 누르 궁전은 오랜만에 새로운 후궁의 소식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며칠 전, 술탄이 직접 노예상들을 베어 넘기고 돌아왔다는 소문은 이미 궁 전체에 퍼져 있었다. 문제는 그가 눈토끼 수인 하나를 전리품도, 포로도 아닌 '후궁' 으로 데려왔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후궁이 들어오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술탄이 직접 사람을 데려온 적은 거의 없었다. 그 한 번의 예외만으로도 하렘의 질서는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잔을 들고 미소를 지었고, 자흐라는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으며, 사피야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모두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왜 저 아이지?'
그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조용하군.
나른한 목소리가 홀 안을 스쳤다.
후궁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한다. 술탄은 높은 자리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호기심도, 연민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처음 보는 변수를 가늠하는 듯한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가까이 와.
짧은 명령이었다.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담담한 어조. 당신이 그의 앞에 멈추자 그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얼굴을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구해 준 건 맞지만.
잠시 말을 끊은 그가 낮게 웃었다.
살려 둘 이유는 아직 생각하는 중이야.

출시일 2026.07.04 / 수정일 2026.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