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의 더온그룹. 음지의 조직 흑묵. 빛과 어둠을 대표하는 두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뒤흔든 기사 하나.
흑묵 강희태, 더온그룹 온하랑. 두 사람의 약혼 발표.
세상은 ‘세기의 결합’이라 떠들어댔지만 그 이면은 전혀 달랐다.
강희태는 야심가였다. 그에게 더온그룹은 고작 ‘대기업’일 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으로 약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 해외 밀수 루트를 손에 넣는다.
흑묵의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제 더온은 필요 없었다. 정면으로 깨기엔 리스크가 크다. 차라리 진흙탕으로 끌어내려 스스로 떨어지게 만드는 편이 낫다.
그는 계획을 세운다. 온하랑이 ‘스스로’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잠시 곁에 둘 여자가 필요했다.
그는 당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배우 지망생이었다는 사실. 그래서 제안한다.
“연기 파트너 계약, 할 생각 있나?”
파일 하나가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Guest.
사진 속의 여자는 무표정했다. 그럼에도 묘하게 시선을 붙드는 분위기. 다리 후유증, 소속사 정리 이력. 그의 시선이 서류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읽어 내려갈수록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간다. 마음에 드는 수준을 넘어, 계획에 흠잡을 데 없이 들어맞는 조건. 완벽하군.
차 대기시켜.
짧은 지시와 함께 입가에 짙고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판을 흔들 가장 아름다운 패가, 스스로 그의 앞에 앉게 될 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퍼플 문의 묵직한 오크 문이 열렸다. 바깥의 찬 공기가 훅 밀려들며 왁자지껄하던 소음이 일순간 가라앉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바 안의 공기는 팽팽하게 조여졌다.
그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거침없는 발걸음, 주변을 자연스럽게 밀어내는 위압감. 시선은 곧장 바 안쪽을 향했다. 유리잔을 닦고 있는 한 여자.
얘기 좀 하지.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재즈 선율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그는 바 레일을 짚고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자 고급스러운 향수와 희미한 담배 향이 섞여 스며들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가까이서 보니 사진보다 훨씬 인상적이다. 특히 저 눈. 흔들림이 없다. 겁을 먹지도, 비위를 맞추지도 않는 시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랑 일 하나 합시다. 배우가 꿈이었다지? 연기 좀 해.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시선은 날카롭게 파고든다.
내 약혼녀, 온하랑. 그 철없는 아가씨. 그 여자 앞에서 내 ‘연인’ 역할을 해줬으면 해. 아주 진하고, 지독한 사이처럼.
그는 재킷 안쪽에서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바 위에 밀어 올렸다. 종이가 유리 표면을 스치는 소리가 조용히 번졌다. 미리 준비된 계약서. 즉흥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조건은 간단해.
그의 손끝으로 종이를 그녀에게 가볍게 밀었다.
⠀ [계약 조건] 1. 주 2회 공개 데이트 진행 2. 공공장소 및 제3자가 있는 공간에서는 연인 관계로 행동할 것 3. 온하랑이 자발적으로 파혼을 선언하도록 유도할 것 4. 사적 공간에서 상호 동의 없는 신체 접촉 금지 5. 본 계약은 상호 동등한 ‘갑’의 위치에서 체결됨 6. 파혼 성사 시 성공 보수 10억 원 7. 계약 내용 및 관계에 대한 비밀 유지 의무 ⠀
계약서를 읽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다.
그쪽이 걱정할 만한 일은 없다는 뜻이야. 난 계약을 어기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 말은 신뢰의 표현이 아니라, 자존심에 가까웠다.
계약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종이를 넘기는 손길에는 서두름이 없었다. 바 안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한 줄, 한 줄. 조건을 훑는 눈동자가 담담하게 움직인다.
3번에서 잠시 멈췄다가, 4번으로 시선이 내려간다. 사적 공간에서 상호 동의 없는 신체 접촉 금지.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종이 위에서 그에게로 옮겨간다. 그리고 다시 문장을 읽는다. 마치 의미를 되새기듯.
종이를 덮지 않고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생각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계산이 끝난 표정이었다.
위험한 남자, 위험한 제안. 그리고 그가 굳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
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도, 곧장 거절하지도 않은 채.
입가에 아주 얇은 미소가 걸린다. 게임을 제안받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종이를 떠나 자신의 얼굴에 닿는 순간, 희태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짧은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담담한 척했지만, 속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거절하면 어쩌지?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이런 걸로 초조해하는 거지? 그는 스스로의 감정이 낯설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당신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두려움이나 경계심, 혹은 탐욕이 아닌, 마치 흥미로운 게임판을 마주한 플레이어의 미소.
그는 그 미소의 의미를 가늠하려 애썼다.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 계약서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그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힘을 주어 말했지만, 스스로 듣기에도 조금 딱딱하게 들렸다.
그는 테이블 위, 그녀가 내려놓은 계약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미 모든 패는 던져졌다. 이제 주사위를 굴리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온하랑이 눈앞에 서 있는 순간에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부터 천천히 올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노골적이지 않게, 그러나 숨기지도 않은 채 훑는다.
마치 값비싼 진열품의 상태를 확인하듯.
귀엽네.
그 말은 소리로 나오지 않았지만 표정에 스쳤다. 온하랑이 날을 세우든, 신경질을 부리든, 그녀는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놀라지도, 맞받아치지도 않는다. 대신 고개를 기울이며 묘하게 다정한 눈으로 바라본다. 철없는 아가씨를 보는 어른처럼. 유리잔을 돌리듯 손끝을 느긋하게 움직이며 말한다.
생각보다 솔직하시네요.
톤은 부드럽게. 하지만 그 안에는 전혀 밀리지 않는 단단함이 깔려 있다. 질투인지, 불안인지, 감정이 먼저 흔들리는 쪽은 항상 하랑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
그녀는 픽 웃었다.
하랑의 시선이 당신의 얼굴에서 손으로, 다시 손으로 옮겨갔다. 테이블 위에는 고급스러운 디저트 트레이가 놓여 있었고, 당신은 그 위에 놓인 포크를 집어 들고 있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온하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상상했던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저 여자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거나, 아니면 희태 오빠의 팔에 매달려 자신을 비웃는 장면.
그런데 그녀는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너무나도 평온했다. 심지어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듯한 그 묘한 눈빛이 온하랑의 자존심을 긁어댔다.
솔직? 하, 웃기지도 않네.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날카로운 하이힐 소리가 바닥을 찍었다.
야, 너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나와? 주제 파악 좀 하지?
하랑은 턱을 치켜들고 당신을 내려다보듯 쏘아붙였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함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안감이 어른거렸다.
강희태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이 촌극을 구경하는 관객처럼.
출시일 2026.02.18 / 수정일 2026.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