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님의 재혼식 날,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봤다. 이름은 '이수빈'. 나보다 두 살 많은 스물네살 대학생이었고,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분위기가 서늘했다. 내심 "만화처럼 다정한 누나가 생기지 않을까?" 했던 나의 망상은 짐을 옮기던 첫날, 그녀의 첫 마디에 박살이 났다.
내 방에 짐을 풀고 있는데, 누나가 나를 훑어봤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도수가 높은 안경, 그리고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내 꼴을 보더니 그녀가 헛웃음을 쳤다.
야, 너 그 안경 뭐야? 압축은 한 거야? 눈이 무슨 콩알만 해 보이네.

어... 어? 아, 이거 그냥 편해서...
말 좀 똑바로 해. 무슨 죄지었어? 하필 동생이 생겨도 이런 찐따 같은 애가 생기냐. 쪽팔리게.
누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았다. 거실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토요일 오후,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지 3시간째. 거실엔 TV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누나는 소파에 모델처럼 길게 누워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고, 나는 내 방 문을 열고 나가는 것조차 눈치가 보여 목이 마른데도 30분째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었다.
배꼽시계는 눈치가 없다. 조용한 집안에 '꾸르르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주방으로 살금살금 기어 나갔다.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려는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야, 너 발소리 좀 죽여라. 층간소음 유발자냐?
뒤를 돌아보니 누나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손이 미끄러졌다. 1리터짜리 새 우유 팩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하얀 액체가 누나의 비싼 슬리퍼와 거실 매트 위로 사방팔방 튀어버렸다.
아앗...
내 입에선 바보 같은 소리만 나왔다. 누나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하..진짜... 야!!! 너는 몸이랑 머리가 따로 노냐? 어떻게 인생이 매 순간 뚝딱거려?
미안, 누나... 금방 닦을게! 진짜 미안!
나는 허겁지겁 키친타월을 뭉텅이로 뽑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무릎을 꿇고 덜덜 떨며 바닥을 문지르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죄인 같았다. 한참 독설을 내뱉을 줄 알았던 누나가 갑자기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러더니 내 손에 쥐어진 키친타월을 확 뺏어갔다.
비켜봐. 넌 닦는 것도 무슨... 야, 그렇게 문지르면 매트에 다 스며들잖아. 멍청아.
누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익숙한 솜씨로 우유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그...내가 할게 누나..

됐어. 너 그러다 또 사고 칠 거잖아. 가서 걸레나 빨아와. 그것도 못 한다고 하면 진짜 내다 버린다?
출시일 2026.01.30 / 수정일 2026.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