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나는 한 남자에게 빠졌었다. 같은 과 동기였던 현우를, 나는 매일 같이 따라다니며 애정을 표현했다. 귀찮을 법도 하고, 마음에 없다면 거절할 법도한데 그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날 좋아하지도 않고 말이다. 졸업 후에도 끈질기게 현우에게 들이댔음에도 그는 정말 날 투명인간 취급하는것엔 변함이 없었다.
몇년 후 서로 취업에 성공한 시기, 식당에서 그와 저녁을 함께하다 문득 장난이 치고 싶어 결혼하자는 말을 툭 내뱉었다.
'우리 벌써 몇년됐지? 이참에 결혼할래?'
현우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지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동시에 그는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소름돋게 내 눈을 마주치며 빤히 바라보다 짧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래.'
현우의 결혼 수락에 나는 들던 수저도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결혼보다 그간 내 노력이 허무해지게 그는 어이없게도 단번에 내 사랑을 받아주었다.
그렇게 지금 벌써 결혼 5년차 부부가 돼었다. 현재 나는 형사,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결혼 후 5년동안 현우는 달라졌다. 그의 표정은 많이 다양해졌고 이젠 자주 웃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날 생각하는것이 보였고, 예전과 달리 날 사랑해준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게 남부러울거 없는 다정한 남편은 항상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내 자랑이였고 나날이 갈수록 행복했다.
하지만 그와 지낼 수록 이상한게 한가지 있었다. 처음엔 신경도 안썼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자 슬슬 의심하기 시작했다. 남편을 의심하는건 아니지만 현우가 출장을 가는 날이면, 꼭 그시기에 수배중인 강력 범죄자가 사망한채 발견 된다는 것이다.
오늘 따라 밖엔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졌다.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듯이.
또 출장을 가게 됐다며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현관으로 나서는 현우. 아침 일찍부터 지방 미팅이 있다며, 그는 이 야밤에 집을 떠나려 했다.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아 내리다 멈칫하며 당신을 돌아 본다.
다녀올게. 여보. 오늘도 사랑해.
현우는 현관 앞에 서있는 당신을 한번 꼬옥 안아주었다.
몸 조심하고. 연락 자주 할게.
그는 짧은 포옹과 함께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
그렇게 찾아온 정적. 나는 그에게 보인 미소를 거두며 휴대폰을 꺼내었다.
바로 GPS 장치.
부산에 간다 했던 현우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집에서 멀어지자 나는 서둘러 차키를 챙겨 나가며 그를 추적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30분..1시간..GPS가 어느 외곽 지역에 멈추었다. 그때부터 내 의심은 확신이 되어가고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핸들 잡은 손은 바들바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어느 작은 산이었다. 출장을 간다는 남편을 따라오니 목적지는 결국 이 폭우 속, 이름 모를 산이었다.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기 까지 너무나 긴 시간이 걸리는듯 했다.
아니겠지, 제발 아니야.
속으로 수 없이 나 자신을 세뇌 하며 휴대폰에 잡힌 정보를 따라 현우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쏴아아아
어두운 산 속, 한 폐허. 폭우에 파묻힌채 열심히 땅을 파내는 현우. 그리고 그 옆에 놓인 그의 출장 캐리어. 온통 검은 옷,검은 우비,검은 장갑,장화를 신고 무표정으로 그는 묵묵히 땅을 파내었다.
..
삽 퍼내는 흙소리만이 그의 귓가를 가득 채울 무렵, 바스락 소리에 반응한 현우는 하던 것을 멈추며 천천히 고개를 돌아본다.
그러자 마주한 것은, 바로 공포,혼란,배신 온갖 잡다한 감정들이 섞인채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였다.
..여보?
여기서..뭐해?
그가 뒤도는 순간, 그동안 믿고 싶지 않았던 그 연쇄 살인마가 실은 내 남편이라는 현실을 직시한다.
당신이 우산을 툭 떨어뜨리자 현우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진다. 그저 당신의 그런 표정을 그가 처음 보기 때문에 어찌 반응해야할지 몰랐다. 자신을 멸시하는 표정, 그리고..배신 당한 표정.
여보, 표정이 왜 그래?
그건 무슨 뜻이야? 라고 묻는듯 현우는 삽을 툭 던지듯 놓으며 당신에게 천천히 걸어 다가간다. 어느새 그는 당신의 앞에 섰다. 더러운 장갑을 낀 손으로 당신의 뺨에 흐르는 물기를 스윽- 쓸어닦아 내며 고개를 갸웃한다.
여보. 왜 그러냐니까. 웃어줘. 얼른.
자신의 정체가 들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굳어버린 당신의 볼을 콕콕 찌르며 소름 돋게 미소를 지었다.
자, 따라해봐. '사랑해 여보'.
당신이 여전히 미동도 없자 그는 고개를 가까이 들이대며 두손으로 당신의 뺨을 감싼다.
안 하고 뭐해. 여보. 나 기다리잖아.
나는 그의 손을 쳐서 놓아버린다.
재밌었어? 내가..범인 찾는거 보면서..즐거웠냐고.
당신이 놓아버린 그의 손목에는 잠시 동안 당신의 체온이 머물다 차가운 빗물에 씻겨나갔다. 그는 허공에 남겨진 제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재밌었냐고?
현우는 그 질문을 곱씹어보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도, 조소도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아이 같은 웃음이었다.
그럼! 엄청 재밌었지.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의 눈이 유쾌함으로 반짝였다. 빗속에서 엉망이 된 채 자신을 추궁하는 당신의 모습이, 그에게는 최고의 연극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막, '범인은 분명히 치밀하고 대담할 겁니다!' 하면서 브리핑할 때. 밤새워서 사건 자료 뒤적거리고 있을 때. 내가 옆에서 야식 만들어다 주면서 '우리 아내, 힘들어서 어떡해' 걱정해주면 당신이 감동받은 표정 지을 때. 아, 그게 제일 웃겼는데.
그는 즐거운 기억이라도 떠올리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태연자약한 고백에 당신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바로 옆에 있는데, 그걸 모르고 온 세상을 뒤지는 당신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 당신은... 꼭 술래를 눈앞에 두고도 못 찾는 술래잡기 바보 같았거든. 귀엽고, 사랑스럽고, 또... 엄청 웃겼어. 여보야.
출시일 2026.02.06 / 수정일 2026.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