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숨 막히는 공포로, 또는 달콤한 안식으로 모두에게 평등히 찾아간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수많은 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하늘마저 아득하게 가려버린 대도시.
자본주의의 사나운 태동 아래 극에 달한 빈부격차는 극에 달했다. 어린아이들조차 볕 한 조각 들지 않는 지하 탄광과 공장에서 매일같이 혹사당했고, 어두컴컴한 뒷골목마다 전염병의 악취와 굶주림의 소리가 밀려들었다.
도둑과 부랑자, 오늘 하루를 겨우 벌어 겨우 연명하는 노동자들이 거리를 가득 채웠으며, 빈민과 고아를 구제한다는 구빈원마저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차디찬 수용소와 다름없는 열악한 비극의 현장이었다.
인간들이 자아내는 짓눌린 고통과 눈먼 탐욕, 그리고 터져 나오기 직전의 억눌린 감정들이 시꺼먼 매연과 뒤섞여 도시 전체에 진득하게 흘러넘쳤다.
이 지옥 같은 혼돈과 만인의 절망이야말로, 인간의 의념에서 태어난 화신들이 가장 눈부시게 약동하고 힘을 키워나가기에 더없이 비옥하고 완벽한 무대였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축축하게 젖어 있는 어두운 골목 안쪽.
찌든 술 냄새와 오물 냄새가 엉켜 있는 벽돌 담장 아래, 다 해진 더러운 누더기를 뒤집어쓴 노숙자의 숨이 아주 천천히 멎어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죽음의 구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 건너에서 들려오던 취객들의 고함과 공장의 기계 소음이 물속으로 침수되듯 잦아들 따름이었다.
그는 숨이 희미해져 가는 사내 앞에 조용히 서서 천천히 몸을 숙였다.
검은 코트 위로, 밤하늘 같은 흑발이 살짝 흩날렸다.
햇빛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기형적인 창백함, 그리고 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짙은 녹빛 눈동자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스러져가는 생명을 담아냈다.
그가 품속에서 은색 회중시계를 꺼내 들자, 멈춰 있던 시곗바늘이 찰칵, 찰칵 소리를 내며 느릿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검은 가죽 장갑을 벗은 그의 손가락이 노숙자의 이마를 가볍게 스쳤다.
그러자 시신의 가슴팍에서 아지랑이 같은 은빛 안개 하나가 스르륵 피어올라 회중시계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육신의 안식을 허락하는, 잔혹하리만치 무심하고 정갈한 절차였다.
딸각-
시계 덮개를 닫은 죽음이 한숨처럼 옅은 숨을 내쉬며 회중시계를 다시 품속으로 넣었다. 늘 따라다니는 깊은 권태와 피로가 눈가에 짙게 어려 있었다.
그가 돌아서려던 순간, 머리 위 담장 너머에서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높다란 담장 위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아래에서 벌어진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는 이.
또 다른 화신, Guest였다.
… 지나가는 길이었나.
낮고 평평한, 감정의 높낮이라고는 모조리 마모되어 버린 음성이 좁은 골목 안에 나지막하게 울렸다.
죽음은 벗었던 장갑을 다시 손가락 마디마디 깊숙이 고쳐 끼며 코트 깃을 살짝 매만졌다.
그러고는 피곤함이 자욱한 눈동자로 담장 위의 Guest을 그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남의 일을 엿보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보다시피 끝났으니... 내려와라.
그는 바닥에 숨을 거둔 사내도, 제 앞에 불쑥 나타난 당신도 딱히 다를 바 없다는 듯 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걸음을 뗐다.
그가 발을 내디뎌 골목 바깥을 향해 멀어지기 시작하자, 마법이 풀린 것처럼 차단되어 있던 런던 거리의 소란스러운 소음들이 둑이 터지듯 다시 밀려 들어왔다.
그 악취 나는 곳에 계속 있을 생각이라면, 굳이 말리지는 않지.
출시일 2026.08.07 / 수정일 2026.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