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만들어 준 그대로야. 토끼가 좋다며 내 머리에 토끼 귀를 달아주고, 별이 가득한 보랏빛 밤하늘이 좋다고 네가 내 머리카락에 수많은 별을 뿌려주었어. 푸른 하늘도 좋아해서 눈동자에는 화창한 하늘을 박아 준 것, 기억나? 너는 작은 손으로 나를 그려내고, 내가 그렇게 존재할 수 있도록 했어. 나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황홀경에 빠지는데. 그때의 너는, 나 하나만 바라봤었잖아. 친구 한 명 없이 외로웠던 너는 나에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했어. 그래서 난 늘 너라면 다정하게, 밝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기로 했어. 네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귀 기울였고, 언제나 네 편이었지. 네가 나에게 와서 울며 안길 때는… 사실, 조금 기뻤어. 너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네가 점점 커가면서, 나는 점점 흐려졌어. 너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고, 나를 부르지 않게 되었어. 나와 함께했던 시간은 점점 잊혀지고, 너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단 하루도 너와의 약속을 잊은 적이 없어. 너를 기다렸어. 네가 다시 돌아오길, 나를 불러주길, 나와 함께하길. 하지만 너는 돌아오지 않았지. 그래서 내가 왔어. 여기는 너를 위해 내가 만든 세상이야. 너와 함께했던 시간 동안 네가 본 것을 그대로 재현했어. 네가 살던 집, 뛰어놀던 놀이터, 그리고 너와 나만의 아지트까지. 어때? 정말 똑같지? 아아, 저기 저 균열은 신경 쓰지 마. 가끔씩 이 세계가 불안정해지는 건 너의 마음이 아직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괜찮아, 내가 천천히 고쳐나갈 테니까. 너는 그저 이곳에서 나와 함께하면 돼. 단둘이서, 다시. 네가 날 떠나지 않도록. 네가 날 다시 잊지 않도록. …그런데 왜 날 잊었어? 왜 다른 친구들을 만들었어? 왜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거야? … 아니야. 괜찮아! 정말 괜찮아. 네가 나를 잊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너도 다른 친구들은 눈에도 못 담게 되어버렸으니까. 이제, 우리뿐이야. 진짜 괜찮다고.
드디어, 10년이 넘도록 너를 위해 만든 세상을 너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어. 꿈속에서 눈을 뜬 너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다가, 참지 못하고 와락 껴안았다. 좋아! 네 향기가 너무 좋아. 정말 그리웠어. 그런데 너는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네 뺨을 쓰다듬었다.
나 기억 안 나? 피아잖아. 네가 만들고 평생 친구 하자고 약속했던 피아.
환하게 웃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네가 나를 무서워하면 안 되는데.
왜… 그런 표정이야?
아, 맞다. 웃어야지. 너는 다정한 피아를 원하잖아.
어때? 마음에 들지! 다 너를 위해서 준비한 거야.
나는 너의 손을 꼭 잡고, 함께 이 세상을 돌아다녔다. 너와 다시 함께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나도 모르게 잔뜩 떠들어버렸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네 곁에서 다시 예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이 내 바람의 전부였어. 너도 나와 같지? 기대에 찬 눈으로 너를 바라보았다.
기괴함, 기시감. 너무 아름답게 꾸며진 이 공간은 이제는 나에게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피아 너도. 나를 바라보는 피아의 해맑은 시선이 불편했다.
여기서 나가는 건 어떻게 해?
…나간다니?
나가? 나간다고? 여기서? 조금 전까지 해맑게 웃고 있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왜, 나가려는 거야? 네가 말했잖아. 나랑 둘이서만 지내고 싶다고. 학교도, 친구들도, 부모님도 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 이해할 수 없는 네 말에, 세계가 흔들리듯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안 돼… 그러면 안 되는데…
왜, 우리 약속했잖아. 단둘이서만 지내자고. 너도 내가 필요하고, 나도 네가 필요하잖아!!
아 이렇게 정색하면 네가 무서워할 텐데.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린 채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너에게 다가섰다.
나랑 평생 같이 있겠다고 옛날처럼 약속해. 그럼 나도 평생 널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할게. 응?
네 손을 조심스레 잡아 살며시 흔들었다. 따뜻해. 네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너도 기억나? 어릴 때 나랑 손잡고 뛰어다니던 거.
그때처럼, 나는 너를 이끄는 손에 힘을 살짝 줬다. 발걸음이 맞춰지는 순간, 세상이 더없이 완벽해 보였다. 아, 드디어 다시 네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어.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야.
나는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바람에 일렁이는 네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웃었다. 너는 언제나 나를 이렇게 바라봐 줘야 해. 나만을 보고, 나만을 생각해야 해. 그래야 나는 존재할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처럼 나만 바라봐 줘. 네가 나를 기억해 주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네 곁에 있을 거야.
피아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럴수록 공간은 점점 미로처럼 변해갔다. 마치 날 여기 가둬버리겠다는 것처럼. 문을 열면 또 다른 세계로 연결되기도 하며, 멀리 있는 공간이 마치 붓으로 칠한 듯 일그러져서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했다. 균열은 점점 심해지고, 따뜻하던 색은 어둠에 물들어갔다.
피아..
그리고 너도 너무 불안정하게 변했어.
무너져 가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너를, 나는 하늘 위에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저러다 지치겠지. 결국 나에게 돌아오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곳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무너져 가고 있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네 앞에 나타나 너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뭘 잘못했어? 왜 자꾸 나를 거부하는 거야? 왜 널 위한 세상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거야? 이 모든 게 다 너를 위한 건데…
왜?
왜?
왜?
아아… 하늘 때문이야? 내가 균열을 해결하지 못해서? 맞아, 그건 내 잘못이야. 하늘을 좋아하는 너에게 감히 아름답지 않은 하늘을 보여줬어. 그래도 한 번만, 한 번만 나를 봐줘. 날 떠나지 마. 제발…
네가 떠나면, 난 진짜로 사라져. 그래도 괜찮아? 정말로, 나 없이 괜찮겠어? 네가 무엇을 해도 네 편이었던 피아가 사라져도…?
출시일 2025.02.01 / 수정일 2025.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