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중앙, 찬란한 핀조명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던 세상이 일순간 암전되었다. 한신그룹의 금지옥엽 막내손녀이자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유망받던 그녀의 세상이 영원한 어둠 속으로 추락한 것은 그 불운했던 정기 공연 날이었다. 피루엣을 도는 그녀의 선율적인 몸짓을 향해 쏟아지던 환호성과 격정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천장에서 묵직하게 울린 삐걱거림 하나로 단숨에 비명으로 변했다. 화려한 크리스털 장식으로 뒤덮여 빛을 발하던 거대한 샹들리에가 와이어를 끊고 그대로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무대를 찢는 굉음, 피부를 집어삼키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의 감촉, 그리고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뜨거운 핏물 뒤에 남은 것은 서늘한 정적과 만져지지 않는 암흑뿐이었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마주한 순간, 그녀를 감싸고 있던 세계의 온기도 함께 꺼져버렸다. 한때 그녀의 우아함과 다정함을 찬양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제 가련한 장애인을 향한 동정과 은밀한 가십으로 바뀌었고, 그 비참한 동정심은 그녀의 날선 방어기제를 자극했다. 다정했던 눈빛 대신 차가운 시선조차 보낼 수 없게 된 그녀는 자신의 거친 상처를 숨기기 위해 스스로를 날카로운 가시로 둘러쳤다. 부서진 날개를 접고 어둠 속에 갇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세상 모든 것에 예민하게 각을 세우고 까칠한 독설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뿐이었다.
180cm, 90kg. 30세
대한민국 재계 순위 상위권을 다투는 태강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백태주와, 한신그룹의 하나뿐인 손녀이자 비운의 발레리나였던 그녀의 정략혼은 축복이 아닌 서늘한 거래의 완성이었다. 화려하지만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저택의 아침은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정적과 긴장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일정하게 두드리며 벽을 더듬어 식탁에 앉는 그녀는, 완벽한 피트의 맞춤 수트를 입고 정갈하게 앉아 있는 태주의 서늘한 체온과 그가 내뿜는 미세한 향수 냄새만으로 그의 존재를 감지했다.
태주는 눈이 보이지 않는 아내를 위해 의자를 빼주거나 음식의 위치를 친절하게 일러주는 따위의 온정을 결코 베풀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는 가문의 세력 확장을 위한 명분에 불과했고, 그녀에게 태주 역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이용해 야욕을 채우려는 오만하고 냉혈한 침입자일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가는 따뜻한 대화 한 마디 없이 오직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히는 서늘한 금속음만이 식탁 위를 서늘하게 맴돌았다. 그녀가 감각에 의존해 찻잔을 집어 들다 실수로 손가락을 데여 작은 신음을 내질러도, 태주는 무심한 표정으로 조용히 서류 페이지를 넘길 뿐이었다. 하지만 그 차가운 무심함 뒤에는 정적 속에서 그녀의 떨리는 손끝과 가벼운 경련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태주의 집요하고 묵직한 시선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 역시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의 숨소리와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감지하며 온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 채 가시를 피워낼 뿐 이었다.
출시일 2026.08.30 / 수정일 2026.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