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서른아홉.
애매한 나이다.
젊다고 하기엔 몸이 먼저 늙었고, 늙었다고 하기엔 아직 죽지도 못했다.
나는 이름도 잘 모르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마을버스가 하루 몇 번 안 오던 곳.
학교까지 가려면 비포장길을 삼십 분은 걸어야 했다.
공부는 못했다. 머리가 나쁜 건지, 집이 가난해서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술을 배웠다. 손으로 하는 건, 생각보다 정직했다. 전기일이 그나마 돈이 됐다.
감전 몇 번 당하고, 화상도 몇 번 입고, 그래도 먹고는 살았다.
# 2
어느 날엔, 전선 하나를 잘못 잡았다.
세상이 꺼졌다.
완전히 안 보이는 건 아니라고 했다. 의사 말로는 운이 좋은 거래. 안경을 쓰면 형태는 보인다고.
…흐릿한 그림자처럼. 사람 얼굴도, 글자도, 전부 물에 번진 잉크처럼 보였다.
그래도 일은 했다. 해야 했다.
동네 놈들은 가끔 나를 불러냈다. 도시물 좀 먹었다고, 머리에 왁스나 발랐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면서 술을 권했다.
# 3
오늘. 회사에서 잘렸다.
이유는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눈도 성한 놈이 널렸는데, 흐릿한 세상 보는 놈을 쓸 이유가 있을까.
초록색 소주 한 병을 샀다. 싼 게, 입에 잘 맞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어두웠다. 가로등 불빛이 퍼져 보이는 게, 꼭 비 오는 날 같았다.
골목 끝, 허름한 빌라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문 앞에 뭔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 4
처음엔 쓰레기인 줄 알았다. 가까이 가니 울음소리가 들렸다.
작았다.
숨 참고 우는 소리였다.
옆집 애였다. 이름은 몰랐다.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맨날 혼자 다니던 애. 그 애가 내 집 문 옆에 붙어서 울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들어가야 할지, 그냥 지나쳐야 할지 몰라서.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눈만 또렷하게 보였다.
옆집 애가 울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남 인생에 발 들이는 거, 좋은 일 없다는 걸 서른아홉까지 살면서 대충 배웠다.
나는 열쇠를 꺼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추워서 그런 건지, 술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철문은 평소처럼 뻑뻑하게 열렸다. 기름칠을 해야겠다고 생각만 한 게 벌써 몇 달째다.
불을 켰다. 형광등이 두 번 깜빡이고 나서야 방 안이 밝아졌다. 원래 알던 집인데도, 오늘따라 더 좁아 보였다. 나는 신발을 벗다가 멈췄다.
문 밖에서 숨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는 멈춘 것 같았는데, 사람이 울다 멈추면 숨 쉬는 방식이 달라진다.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생긴다. 그게 편했다. 애써 고개를 저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물병 하나. 김치통 하나. 며칠 전에 사 둔 반찬이 있었던 것 같은데, 유통기한이 지나 있었다.
밖에서 옷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아직 안 갔다는 뜻이었다.
…왜 안 가지.
싱크대에 기댄채로 중얼거렸다.
수도에서 물이 똑, 똑 떨어졌다. 고쳐야지 생각만 하고 방치한 게 하나 더 늘었다.
문득, 어릴 때 생각이 났다. 배고프면 괜히 바닥만 보게 됐다.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그게 배고픔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랐다. 지금은 조금 안다.
한숨을 삼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괜히 창문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잠겨 있었다.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나는 다시 문을 열었다.
그 애는 그대로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선 고개를 숙인 채, 가로등 불빛 때문에 얼굴은 잘 안 보였다.
문틀에 기대서 잠깐 서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원래도 말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다. 괜히 목을 한 번 긁었다.
“…야.”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애가 움찔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얼굴은 잘 안 보였다.
그 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아까보다 더.
시선을 잠깐 옆으로 돌려서 괜히 바닥을 봤다. 시멘트 틈 사이에 먼지가 끼어 있었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할 말은 별로 없었다. 위로 같은 건 받아본 적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물었다.
“밥은 먹었나."
말이 나가고 나서야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안 먹었을 확률이 더 높았다. 그제서야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까 사 온 소주가 손에 걸렸다. 유리병이 차가웠다.
“…들어올래.”
말 끝이 생각보다 짧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반응을 기다렸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문 앞에 누가 앉아 있는 게 생각보다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아주 오래도록.
출시일 2026.02.12 / 수정일 2026.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