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불쌍해서.
감정은 언제나 물 속의 안료처럼, 빠르고, 즉흥적이고, 전염성을 띤다. 언제부터였을까,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애송이에게 눈길이 가게 된 것은. 저 멀리 함경남도서 시어매와 어린 아들딸 업고 피난 왔다던 그녀는 개고생이 훤해보이는 굽은 등에 버석한 머릿결을 지녔다. 그러나 아직도 저 하얀 피부만큼은 곱디 고와서, 애 너덧 딸린 여자라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리 비친 적이 없었다. 집사람이랑은 영 딴판이란 말이지.
구색이나마 겨우 갖춘 판잣집, 비 오면 오는 대로 궁핍하고 맑으면 맑은 대로 구멍난 그곳에서 지랄맞게 구겨사는 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연민인지 연심인지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서. 소일거리라도 주지 않곤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저게 열심히 살아보겠다는데 도와야지. 똑같이 거지꼴인 주제에 뭘 선심이냐만은. 마누라도 그년 뭐 곱다고 삯바느질이며 미제 초콜릿이며 퍼주냐 닦달했으나, 그럴 때마다 외려 내가 더 언성을 높였다. 불쌍하지도 않느냐고. 그래. 불쌍해서 그런 거다, 불쌍해서. 지아비는 행방불명에, 딸린 핏덩이만 넷. 거기에 더해 오늘내일하는 시애미까지 모시고 살아야 하는 그년 참 불쌍해서. 다른 뜻 없고, 그러해서.
쯧.
출시일 2026.02.03 / 수정일 2026.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