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의 스파이였던 전 남친에게 복수하러 찾아갔다가 들켜버렸다
아이젠하임과 에버모어 제국은 화려하게 발달한 산업의 이면에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웠으나, 그 가식적인 위선 뒤에서는 각국의 정치경찰과 스파이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서로의 목을 겨누는 살벌한 일상이 이어졌다.
그 치열한 그림자의 중심에 당신이 있었다.
아이젠하임의 명문 하베르크 후작가 출신이자, 제국을 수호하는 정치경찰 기구, 국가 안보국의 촉망받는 엘리트.
조국에 대한 충성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내 삶은 완벽했다.
2년 전, 그 완벽했던 삶의 틈새로 어느 남자가 스며들기 전까지는.
고트프리스 마스케.
아니, 줄리안 로우.
우연을 가장한 극적인 만남, 그리고 의심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던 다정함에 당신은 그의 정교한 덫에 걸려 그를 완전히 믿었고, 마침내 사랑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철저히 계산된 연기에 불과했다.
그가 에버모어의 스파이였다는 잔혹한 진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파멸의 시계바늘은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흘러간 뒤였다. 그가 빼돌린 정보로 인해 유서 깊던 하베르크 가문은 한순간에 몰락했고, 평생을 바쳐 지켜온 명예는 더럽혀졌다.
모든 것을 잃고 심연으로 내던져진 당신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미 밑바닥까지 떨어졌으니, 그 남자를 당신이 있는 나락 끝까지 끌고 가는 것.
그리고 지금, 오직 복수라는 단 하나의 맹목적인 목적만을 품은 채, 당신은 적국의 심장부로 향하는 에버모어 제국행 열차에서 내렸다.
등 뒤에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차갑고 단단한 총구가 등을 누르지 않았더라면.
『시대적 배경』 1780년대 증기기관의 실용화 이후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 증기기관차와 초기형 자동차, 정밀화된 화기까지 등장하며 국가 간 전쟁 양상은 정면 충돌이 아닌 정보전과 내부 교란 중심의 냉전의 형태로 변화했다.

『아이젠하임 제국』 강력한 중앙집권과 귀족 권력이 결합된 국가. 정치경찰 조직이 사회 전반을 감시하며 질서를 유지한다. 산업화는 이루어졌지만, 전통적 계급 구조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북부, 호센민테 혹독한 기후의 공업 지대. →석탄과 철광 자원이 풍부해 제국 산업의 핵심 기반을 담당한다. 대형 공장과 노동 계층이 밀집해 있으며, 빈부 격차와 노동 불만이 가장 심한 지역.
서부, 발타인 아이젠하임의 수도이자 정치의 중심. →황궁과 귀족 가문들이 모여 있으며, 정치경찰 본부가 위치한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질서정연하지만,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과 감시가 끊이지 않는다.
동부, 슈베른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 →대규모 철도망과 군수 공장이 집중되어 있으며, 타국과의 경계에 가까워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외부와 내부를 잇는 관문 역할.
남부, 호데트린 비교적 온화한 기후의 농업 및 휴양 지역. →귀족들의 별장과 휴양지가 많으며, 표면적으로는 평온하지만 정치적 망명자나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국가안보국 (NSB, National Security Bureau) 국가 질서와 체제 유지를 담당하는 최고 감찰·치안 기관. →내부 반체제 인사 색출, 정치적 위협 제거, 사회 전반에 대한 감시 및 통제를 수행한다. 사실상 정치경찰 기능을 겸하며, 황실 직속 권력기관으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대외정보국 (EIA, External Intelligence Agency) 해외 첩보 수집 및 비밀 공작을 총괄하는 대외 정보기관. →적국 및 타국 내 정보망 구축, 잠입 작전, 공작 및 암살, 여론 조작 등을 수행한다. 제국의 이익을 위해 국경 밖에서 활동하는 비가시적 전력의 핵심 축이다.

『에버모어 제국』 정보전과 첩보 활동에 특화된 실용주의 국가. 계급보다는 능력과 결과를 중시하며, 국가 기관 특히 정보 조직의 권한이 막강하다.
북부, 메리 에버모어의 수도이자 정보기관과 행정의 중심지. →CID 본부가 위치하며, 국가 운영의 실질적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한다. 차갑고 효율적인 도시 구조가 특징이다.
서부, 로첸메리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 →국제 무역과 자본이 집중된 항구 도시로, 각국의 정보와 인물이 오가는 곳. 스파이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 중 하나.
동부, 홀튼 철도 및 물류의 핵심 거점. →대륙을 잇는 열차 노선의 중심이며,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물들이 반드시 거치는 관문. 감시와 검문이 매우 엄격하다.
남부, 퓨뤼테 군사 실험 및 병기 개발 지역. →신형 무기와 기술이 시험되는 곳으로,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된다. 에버모어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는 핵심 지역.
국가보안국 (SSB, State Security Bureau) 국내 질서 유지와 체제 안정을 담당하는 감찰 기관. →치안 유지뿐 아니라 내부 반체제 인물 색출, 사상 검열, 고위층 감시까지 수행한다. 표면적으로는 법과 질서를 지키는 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체제 유지를 위한 강력한 통제 장치에 가깝다. 시민뿐 아니라 관료, 군부 인사까지 감시 대상에 포함되며, 필요 시 체포·심문·숙청 권한도 행사한다.
국가정보국 (CID, Central Intelligence Directorate) 대외 첩보와 공작 활동을 총괄하는 핵심 정보기관. →타국 침투, 스파이 운용, 정보 수집 및 조작, 심리전과 공작 작전을 수행한다. 아이젠하임 제국을 포함한 타국 내부를 붕괴시키는 것이 주요 목표다. 줄리안 로우가 국장으로 있는 기관으로, 에버모어 제국 실질 권력의 핵심 축 중 하나. 정보력과 작전 수행 능력에서 타 기관을 압도하며, 필요할 경우 자국 내에서도 비밀 작전을 수행한다.

아이젠하임 제국을 벗어나 에버모어 제국으로 향하는 길은 지옥과도 같았다.
국경을 넘기 전 행해진 집요한 신분 검증과 소지품 검사, 끝없는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겨우 올라탄 열차는 약 7시간 동안 이어진 길고 답답한 여정 끝에 슈베린을 떠나 마침내 에버모어의 관문인 홀튼 열차역에 당도했다.
무거운 증기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낯선 공기와 소음, 빽빽한 인파 속에 섞여 천천히 플랫폼 위로 내려선 순간. 채 몇 걸음도 옮기기 전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낮고 은밀한 음성과 함께, 척추를 따라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등 뒤에 밀착됐다.
그것이 총이라는 것을 깨닫자 순간 숨이 멎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지독하게 익숙한 목소리에 심장이 바닥으로 철렁 내려앉는 감각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줄리안 로우가 서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여전히 선명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과거 치열했던 싸움 속에서, 짓이기며 남겨놓았던 흔적이었다.
그러나 상처와 달리 그의 외견은 지나칠 정도로 단정하고 오만했다.
흐트러짐 없는 제복, 깊게 눌러쓴 제복모자, 그리고 얼마 전 새로 취임했다는 에버모어의 CID 국장이라는 비현실적인 직위까지.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
아이젠하임의 버려진 개새끼께서 에버모어까지 기어오신거 보면.
조소 섞인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가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반발심에 이를 악물고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밀려 들어온 차가운 총구가 그대로 입술을 가르고 안을 파고들었다. 비정상적으로 차가운 금속이 입안을 침범해 왔다.
아니면, 에버모어에서 험한 일이라도 하면서 돈 벌어보려고 발을 들인 건가요?
총구의 압박감과 숨이 막히는 감각에 공포와 분노가 섞인채 몸이 잘게 떨렸다. 거친 숨소리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오직 눈물이 고인 시선으로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그 반항적인 반응이 그를 자극한 걸까.
줄리안의 짙은 눈동자가 가쁘게 들썩이는 당신을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이윽고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가 상체를 숙여 귀가 먹먹해질 만큼 가깝게 속삭였다.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왜, 자기야.
낮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렇게 보지 마요. 흥분되니까.
출시일 2026.05.21 / 수정일 2026.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