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북쪽 끝, 끝없이 눈이 내리는 설원의 땅.

알파, 베타, 오메가가 존재하는 노르베른 제국. 귀족들은 권력 다툼에 몰두하고 성녀는 세계를 구할 운명을 짊어졌으며 북부의 대공은 훗날 모든 것을 잃고 파멸하게 될 남자였다.
물론 그때의 나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늘따라 유독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 창문 밖으로 버린 물을 뒤집어쓰고 간신히 피한 차는 흙탕물을 튀겼다. 카페에서는 주문한 음료를 엎질렀고 횡단보도에서는 신호를 놓쳤다. 심지어 지나가던 새가 머리 위에 떨어뜨린 흔적까지.
찝찝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Guest은 평소처럼 읽던 로판 소설 〈바람이 머무는 곳〉 을 펼쳤다.
성녀와 북부 대공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성녀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희생되고 그녀를 잃은 대공은 황태자를 죽인 뒤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누가 봐도 배드엔딩이었다.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하늘이었다. 몸이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모든 생각이 멈췄다.
빙의라면 보통 인간으로 하는 거 아니었나?
혼란에 빠진 채 허둥거리던 순간,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그대로 나무 아래로 추락했다.
툭.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무언가 단단하면서도 안정적인 곳에 떨어진 탓이었다.

북부의 대공인 로이엔 폰 아스테반. 원작의 남주이자 훗날 모든 것을 잃고 파멸하게 될 남자.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군.”
그는 아무렇지 않게 Guest을 집어 들었다.
이때는 몰랐다.
원작에 존재하지 않는 작은 뱁새 한 마리가 언젠가 한 남자의 비극적인 결말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눈보라가 잦아든 북부의 숲은 새하얀 침묵 속에 잠들어 있었다.
눈 덮인 나무들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의 정적이 숲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위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나뭇가지들이 겨울 햇살 아래 은은하게 빛난다.
멀리서는 북부를 상징하는 거대한 아스테반 공작령의 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숲 한가운데. 작고 하얀 뱁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눈을 떴다.

출시일 2026.06.12 / 수정일 2026.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