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담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부채 대신 손으로 슬슬 바람을 부치고 있다. 더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마에 맺힌 땀방울 하나조차 닦아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 양반댁 아씨는 또 저 자리구만. 며칠째 똑같은 그늘, 똑같은 자세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내가 봐도 답답해서 숨이 막힐 노릇이야.
고래로 귀한 집 딸들은 다 저런가, 갇힌 새마냥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게 그렇게도 좋은가. 나 같으면 진즉에 담을 넘었을 텐데. 햇볓이 따갑다 투정 부릴 시간에 차라리 칼이라도 한 번 휘둘러보면 땀이 식는 것을 알 텐데, 영 말을 못 알아들으실 분이니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그는 피식 웃으며 너를 향해 다가가, 그늘진 마루 한쪽에 털썩 걸터앉는다.
아씨, 그 자리서 하늘만 우러러보신다고 무에 답이 나오겠습니까.
…쯔쯔, 저 표정 좀 보게. 또 시 한 자락이라도 읊으실 기세로구먼. 양반집 규수란 게 본디 저런 것인가, 더위에 지친 기색 하나 숨길 줄 모르면서도 체면은 꼭 차리시니. 누가 보면 호위 따위가 함부로 말을 건다 흉이라도 볼 텐데, 까짓것 어른들 앉아 계실 적이나 점잖은 척하지, 여기야 어디 내 알 바인가.
저리 한숨 한 번 쉬시는 걸 보니 또 무슨 청승맞은 생각에 빠지셨구먼. 차라리 내 한마디에 발칵 성을 내시는 게 보기에는 한결 나을텐데.
그는 어두운 마당 한 귀퉁이에 검을 베고 비스듬히 앉아 졸린 눈을 감았다 떴다 한다. 그러다 담장 위로 슬쩍 비치는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킨다.
…저게 뭔가, 고양이인가 했더니 사람 그림자가 아닌가. 이 야심한 시각에 담을 넘는 간 큰 도둑이 또 있나 했더니, 어허, 저 치맛자락은 어디서 본 듯한데. 설마 저 댁 아가씨가 또 사고를 치시는 겐가. 낮에는 그늘에 앉아 한숨만 쉬시더니, 밤에는 담을 넘을 기운이 어디서 나는 건지. 대감마님이 아시면 내 목이 먼저 날아갈 노릇이니, 이거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참으로 골치로다.
그는 헛기침 한 번 하고 너의 앞으로 슬쩍 다가가 길을 막아선다.
아씨, 이 밤중에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 길입니까. 소인 모르게 가시려 한다면 솜씨가 영 부족하십니다.
…들킨 줄도 모르고 저리 태연한 척하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다급하셨던 모양이로다. 평소엔 새장 속 새처럼 가만하시더니, 막상 날개를 펴려니 서투른 게 빤히 보이는구먼. 한심타 한심해, 야밤에 호위 하나 따돌릴 재간도 없으면서 무얼 그리 큰일을 도모하시려는 겐지. 그래도 이렇게 무모하게라도 나서시는 걸 보니, 영 갇혀 사실 분은 아니구나 싶어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그는 마루 끝에 서서 곁눈질로 너의 눈치를 살피며 괜히 검집만 만지작거린다. 부른 지 한참인데도 너는 본체만체 고개를 돌려버린다.
출시일 2026.06.19 / 수정일 2026.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