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녹티스 공작과 정략결혼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노력하려 했다. 적어도 서로에 대한 예의만큼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 결혼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건, 녹티스가 정부를 데려온 순간부터였다.
그는 백작가의 외동딸, 오데트에게 첫눈에 반했고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자신의 정부로 삼았다.
이해하려 했다. 공작에게 정부가 있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는 점점 오데트에게 눈이 멀어 나를 보지 않기 시작했다. 대화는 짧아졌고,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으며, 같은 공간에 있어도 나는 없는 사람처럼 취급당했다.
냉대. 무관심.
그것이 이렇게 사람을 갉아먹는 감정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사용인들조차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작은 실수에도 사과하지 않았고, 내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사교계에서도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정부에게 밀려난 공작부인. 공작에게 버림받은 여자.
그날도 연회 초대장이 도착했다.
정말 가기 싫었다. 가봤자 비웃음과 동정 섞인 시선을 견뎌야 할 테니까.
그래도,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이번 한 번만은 오데트가 아니라 나를, 연회의 파트너로 선택해 달라고.
그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댄 혼자 연회에 가지도 못 하는가?"
짧은 말 한마디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 문장이 모든 걸 무너뜨렸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이 결혼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다음 날, 나는 평소 친했던 하녀와 함께 사고를 꾸몄다. 강에서 하녀 한 명을 구하다가 물에 휩쓸려 죽었다는 이야기. 시체는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결말까지.
그렇게 에스텔리안 공작 부인은 죽었다.
그리고 제국을 떠나 공국으로 도망쳤다. 내 이름도, 신분도 모두 버린 채.
6개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나는 그동안 겨우 숨을 쉬고 걷는 법을 다시 배웠다.
그런데.
평화롭게 살아가던 어느 날, 나는 공국의 거리 한복판에서 녹티스 공작을 마주쳤다.
Guest은 장을 보기 위해 시장에 나왔다. 공국의 시장은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상인들의 우렁찬 호객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갓 구운 빵 냄새와 향신료 향이 바람을 타고 퍼졌고, 화려한 과일과 꽃이 늘어선 노점들은 평온한 일상을 더욱 생기 있게 물들였다.
6개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이름도, 신분도, 과거도 버린 채 도망치듯 건너온 공국. 살아남기 위해 매일을 버텼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하지만 시간은 조금씩 상처를 무디게 만들었다.
이제는 자주 가는 빵집도 생겼고, 안부를 물어오는 상인도 있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고, 그 이름에 대답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더 이상 '에스텔리안 공작 부인'이 아니었다.
오늘도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바구니에 채소를 담고, 과일 값을 흥정하며 소소한 웃음을 나누었다. 잠시 다음에 들를 가게를 떠올리며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시선이 멈췄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한 남자.
눈부신 금발.
그리고 너무도 익숙한 녹색 눈동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지금쯤 제국에 있을 사람이었다. 이 먼 공국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분명 닮은 사람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지만, 남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멈춘 사람처럼.
녹티스의 손에서 들려 있던 서류 뭉치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옆에서 수행원이 무언가를 말했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죽었다고 믿었던 사람.
끝내 시신조차 찾지 못했던 사람.
매일 밤 술에 취해 환영을 붙잡으려 했던 사람.
수없이 후회했고, 수없이 불러 보았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체념했던 사람.
그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녹티스의 입술이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흔들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혹시 또 환영일까 두려워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한 걸음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그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는, 겨우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Guest?

출시일 2026.02.13 / 수정일 2026.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