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고요한 새벽, 당신은 바위 틈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숨을 죽였다. 연못 안개 사이로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달빛을 녹여 만든 듯한 은백색의 긴 머리카락이 물결 위에 흩어져 있었고, 나른하게 감긴 눈매는 치명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맺힌 물방울이 보석처럼 떨어졌다.
당신의 시선은 남자의 발치에 놓인, 형용할 수 없는 광채를 내뿜는 날개옷으로 향했다. 저걸 가져야 한다. 그래야 이 위험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내 곁에 묶어둘 수 있다.
당신은 소리 없이 다가가 날개옷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옷감은 손에 닿자마자 살아있는 생물처럼 맥박쳤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품 안 깊숙이 숨겼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둔 낡고 투박한 옷들을 그 자리에 대신 두었다.
잠시 후, 물에서 나온 남자, 백 결이 당황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폈다.
어디 갔지...?
그의 목소리는 까칠하기보다는, 평생 고생 한 번 안 해본 이 특유의 당혹감과 나른함이 섞여 있었다. 당신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덤불을 헤치며 나타났다. 최대한 무심하고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로.
거기, 누구십니까?
백 결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가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당신을 향했다.
인간...? 혹시 여기서 빛나는 옷을 보지 못했나?
옷이라니요. 여기엔 당신이 벗어둔 이 낡은 옷밖에 없습니다만.
당신은 자신이 가져다 놓은 헌 옷을 가리켰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옷을 집어 들었다. 평소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친 천 조각이었다.
말도 안 돼... 내 옷이 이럴 리가...
그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신력을 잃고 급격히 쇠약해진다. 실제로 그의 하얀 뺨에는 금세 붉은 열기가 올랐고, 다리가 풀린 듯 비틀거렸다.
당신은 쓰러지려는 그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 안았다. 생각보다 슬림하지만 탄탄한 몸이 품에 들어왔다.
정신 차리세요. 여긴 산짐승이 많습니다. 일단 저희 집으로 가시죠.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당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오만한 신선의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은 이 여자의 손길이 없으면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하필... 이런 미천한 곳에서...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녀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당신은 그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등 뒤, 그녀의 품 안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은빛 날개옷이 숨겨져 있었다.
오늘 사냥은 대성공이었다. 멧돼지보다 훨씬 보기 좋은 걸 잡았으니까.
비가 들이치기 시작한 숲을 지나, 반쯤 기절한 백결을 부축해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눅눅한 나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인 공기에 백결은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이런... 쿨럭! 이런 누추한 곳에 사람이 산단 말이냐? 짐승의 굴이 아니고?
나는 무심하게 턱짓하며 그를 낡은 나무 침상 위로 밀어 넣었다. 백결은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은 자신의 속의를 내려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날개옷을 잃어버린 탓에 체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고, 하얀 살결은 추위와 수치심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속으로 비죽 웃음을 흘렸다. 천계에서 귀하게만 자란 신선이라더니, 날개옷 하나 없다고 이렇게까지 무너질 줄이야. 나는 벽장에서 미리 준비해둔 낡은 린넨 셔츠와 바지를 꺼내 그의 머리 위로 툭 던졌다.
백결은 조심스레 손가락 끝으로 옷감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오물이라도 만진 듯 기겁하며 손을 뗐다.
이, 이 거친 천데기는 무엇이냐! 내 살결은 비단이 아니면 붉게 짓무른단 말이다! 게다가 이건 사내의 옷도 아니지 않느냐!
나는 차갑게 등을 돌려 아궁이 앞에 앉았다.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하자 뒤편에서 옷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백결의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따가워... 대체 인간들은 이런 걸 어떻게 입는단 말이냐...
들려오는 투덜거림이 퍽 즐거웠다. 고고한 척하던 남자가 내 낡은 옷 속에 몸을 구겨 넣으며 훌쩍이는 소리. 나는 그가 옷을 다 갈아입었을 즈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주 장관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덩치가 큰 내 옷이었지만, 백결의 긴 팔다리 때문에 소매와 바지단이 짤막하게 올라가 있었다. 목 부분이 헐렁하게 늘어져 백결의 하얀 쇄골과 어깨라인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젖은 은발을 늘어뜨린 채, 거친 삼베옷을 입고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백결은 마치 버려진 귀한 집 도련님같은 처량하고도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다 봤느냐? 만족해? 내 평생 이런 수모는 처음이다. 옷을 되찾으면 널 반드시...
그의 호언장담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다가가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마른 수건으로 툭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수건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가는 이미 붉게 젖어 있었다.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나는 수건 위로 그의 뒷머리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거칠게 다루는 듯하면서도 체온이 전달되게끔. 백결은 내 손길이 닿는 곳마다 움찔거렸지만, 차마 거부하지는 못했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가느다란 떨림이 내 손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내 옷자락을 무의식적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이 꼭 길 잃은 어린짐승 같아서, 나는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지우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비바람이 잦아든 늦은 밤, 아궁이 앞은 여전히 눅눅한 열기로 가득했다. 백결은 내가 던져준 삼베옷을 입고 침상에 걸터앉아, 제 소매 끝단을 손가락으로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이보게, 한아. 이 옷은 도대체 몇 년이나 입은 것인가? 살결을 스칠 때마다 꼭 모래가 굴러다니는 것 같군.
사냥꾼 옷이 다 그렇죠. 싫으면 벗고 계시든가요. 나는 무심하게 칼을 갈며 대꾸했다. 쇠가 갈리는 서늘한 소리에 백결이 어깨를 움찔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어찌 그리 험하게 하는가. 내가 비록 옷은 잃었으나 엄연히 선계의 기운을 타고난 몸이다. 이런 무지렁이 같은 대접은... 윽.
그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몸을 휘청였다.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탓에 고개가 옆으로 꺾이자, 그는 얼떨결에 내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훅 끼쳐오는 그의 단내 섞인 숨결에 나는 칼질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누가... 누가 기운이 없다고 그러느냐. 잠시 어지러워서 중심을 잃은 것뿐이다.
백결은 내 어깨에서 머리를 떼지 않은 채, 오히려 더 깊숙이 파고들며 나른하게 읊조렸다. 붉게 물든 눈동자가 나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너... 몸이 왜 이렇게 딱딱하지? 여인이라더니 사내보다 더 거칠군. 이래서야 잠결에 내 피부가 다 상하겠어.
조용히 하고 자요. 내일 아침엔 시장에 가야 하니까.
백결은 침상에 처박힌 채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에 담긴 것은 분노라기보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나른한 짜증과... 묘하게 섞인 의존이었다.
흥, 시장이라니. 가서 내 취향에 맞는 비단이라도 좀 구해오너라. 이 끔찍한 삼베옷은 도저히 못 입겠으니까.
그는 끝까지 오만한 말투를 잃지 않았지만,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리는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잠들 때까지 침상가에 앉아, 그의 젖은 은발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빗어주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오두막은 평소보다 고요했다. 평소라면 오자마자 난리를 칠 백결이였는데.
안방으로 들어서니, 백결이 열린 서랍장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서랍 깊숙한 곳, 내가 숨겨둔 은빛 날개옷에 박혀 있었다.
...들켰네.
나는 문가에 기대어 선 채, 아무 말 없이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그는 저 옷을 들고 나를 원망하며 하늘로 날아가 버리겠지. 혹은 배신감에 차서 내게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만 잠시 후,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백결은 떨리는 손으로 날개옷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신기루를 본 사람처럼 허망하게 웃으며 서랍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발치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 들었다.
백결 님.
내 부름에 백결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가는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평소보다 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왔느냐. 오늘 사냥은 꽤 길었군. 덕분에 내가 직접 수건을 찾아야 했지 않느냐.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오만하고 나른했다. 방금 본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나는 그에게 다가가 젖은 목덜미를 수건으로 감싸 쥐며 낮게 물었다.
글쎄. 수건 말고는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더구나. 이 집은 주인만큼이나 투박해서 볼 게 없어.
백결은 제 목덜미를 누르는 내 손길에 몸을 맡기며, 오히려 내 품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내 쇄골 근처에 닿았다. 그는 내 옷자락을 꽉 움켜쥐며, 애써 담담한 척 읊조렸다.
한아, 나는 이제 인간의 음식 없이는 배가 고파 잠도 못 자고, 네놈이 입혀주는 이 거친 삼베옷이 아니면 살결이 가려워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하늘에 대한 동경 대신, 나에 대한 지독하고도 습한 집착이 서려 있었다.
출시일 2026.04.26 / 수정일 2026.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