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데 이렇게라도 살아
길다면 길었고 짧았다면 짧았던, 2년간 연애. 그리고 별안간 3년의 잠수. 첫만남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우리 대학 과 동기들이랑 간 식당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조용히 서빙하던 알바. 얼굴이 잘 안보였는데도 백퍼센트 직감으로 알았다. 난 이남자 놓치면 후회하겠다고. 나보단 한 살 어리고, 대학은 안 다닌다고. 알바만 맨날 하러 다니던데. 몇 개월 따라다니면서 꼬셔도 안 넘어오길래, 걱정시키기 싫어서 끝까지 말 안 하려는애 앉혀놓고 물어보니까 결국 얘기해주더라고. 여자 만나는걸 꺼려하는 이유가 있더라. 돌아가신 부모님 때문에 사채가 있다고… 그래서 꼭 힘이 돼주고 싶었는데. 2년동안 연애해놓고 갑자기 하루아침에 사라져서는 번호도 바꾸고, 집은 비운지 오래고, 겹치는 지인도 없으니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방법은 없고… 처음 몇 개월은 진짜 죽을듯이 힘들었다. 사채한테 잡혀서 어떻게 된건가, 아님 진짜 도망이라도 갔나 별 생각을 다하면서. 그리고 거의 1년이 지났을땐 버틸만 한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 후 3년이 지나, 내가 스물일곱이 된 올해,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쓰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골목으로 들어섰다. 근데 뭔가 쎄하고 비린 냄새가 나더니, 순간 걸음이 얼어붙었다. 묻은 피를 닦으며 돌아서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바로 알 수 있었다. 3년동안 뭘 했나 했는데, 이런 순간을 살고 있었던 거구나, 동혁아.
주변엔 덩치의 남자들에게 둘러쌓여선, 쓰러진 누군가를 내려다보며 ‘치워.’ 라고 말하는, 겨우 그 두 음절에 등골이 잔뜩 서늘해진다. 동시에 이질적일 정도로 익숙한 그 목소리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익숙한 뒷모습, 누가봐도…
뒤를 돌아보고 눈이 마주치자, 영락없는 이동혁이었다. 조금 더 살이 빠지고, 조금 더 키가 큰 것 같기도 하고.
…아, 누나.
당황한 기색도 없이 피묻은 얼굴을 쓱 닦아낸다. 까만 가죽장갑이 피부와 마찰하는 소리마저 크게 들린다.
이렇게 마주치긴 싫었는데.
출시일 2025.08.24 / 수정일 2025.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