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년, 신라 서라벌.

강가의 짙은 안개가 채 걷히지 않던 어느 날, 당신은 처음으로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본래 인간의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아야 할 존재였으나, 그날만큼은 안개 너머의 새하얀 무언가가 당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난예'라 소개했다. 아직 하늘에 닿지 못한,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거대하고 기이한 존재 앞에 마땅히 두려움을 느껴야 했음에도, 당신의 발걸음은 며칠 뒤 거짓말처럼 다시 강가로 향했다.
인긴과 영물, 결코 말이 통할 수 없는 사이였음에도 둘 사이에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이해가 겹겹이 쌓여갔다.
난예는 점차 당신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듯 익혀갔고, 당신 역시 그의 서늘한 곁에서 모든 경계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서로를 기다리는 것이 당연해진 어느 날, 두 사람은 마침내 연인이 되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남몰래 강가로 나아갔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서만 허락되는 짧은 순간들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결심했다. 이 숨 막히는 땅을 떠나기로. 아무도 두 존재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함께 도망치기로.
달이 가장 높이 차오르는 밤, 그 강가에서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비극은 그 무렵부터 싹트고 있었다. 당신의 눈에 기이한 것들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난예의 곁에 너무 오래 머문 탓일까, 혹은 그가 품은 여의주의 영기에 서서히 물든 탓일까. 당신의 시야는 더 이상 인간의 한계에 머무르지 않았다. 난예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숨어 있던 온갖 요괴들의 형상까지 선명하게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그 불길한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당신의 아비였다.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는 딸을 아비는 미쳐버린 것으로 여겼다. 가문에 흉흉한 소문이 퍼지기 전에 서둘러 처리해야 했다.
'귀신 들린 년'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전, 아비는 당신을 치워버리듯 다른 이에게 팔아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경주의 이름 모를 진골 사내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둘러 혼사가 정해지고 말았다.
약속한 밤이 다가왔지만, 당신은 끝내 그 강가로 향하지 못했다. 애달픈 약속 대신 하얀 혼례복을 처연하게 차려입은 채, 당신은 말없이 거친 꽃가마에 몸을 실어야 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가마는 집을 떠나 낯선 길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가마를 집어삼킬 듯 무거운 침묵을 깨고 사치스러운 비단 천 너머로,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익숙하고도 서늘한 기척이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피에 물든 채로.

밤이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듯 고요한 어둠 속에서, 당신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채 꽃가마에 실려 가고 있었다.
약속이 있었다. 며칠 전, 강가에서 난예를 만나 같이 도망치기로 했었다. 하지만 당신은 약속 장소로 향하는 대신, 분과 연지가 발려진 채, 낯선 사내의 집으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당신은 불안감을 떨치려는 듯 손목에 감긴 목주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아비가 마지막으로 쥐여준 조잡한 물건이었다. 귀신을 내쫓는 다는. 그리고 귀신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그것만이 지금 당신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보루였다.
덜컹.
꽃가마가 갑자기 거칠게 흔들렸다. 당신의 몸이 한쪽으로 쏠리며 숨이 턱 막혔다.
바깥에서는 가마꾼들이 당황해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가마꾼의 목소리를 끝으로, 이내 꽃가마가 바닥에 거칠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뒤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급한 발걸음도, 거친 숨소리도, 밀어 부치는 속삭임조차 없었다.
몇 분이 지났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기괴한 정적이 흘렀다. 당신은 밀려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문을 밀어보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 꽃가마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혔다.
그리고 좁은 가마 문틈으로 마주한 것은 난예였다.
당신이 충격에 휩싸여 그저 눈만 깜빡이자,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눈웃음을 지었다.
임, 여기 계셨습니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오늘따라…더 고와 보입니다. 나의 임.
그의 손이 스스럼없이 가마 안으로 들어왔다. 치맛자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당신의 발목을 붙잡듯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따뜻해야 할 손끝은 묘하게 축축하고 진득했다. 시선을 내리자, 그의 흰 손이 붉은 피로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난예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당신의 발목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짚으며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런 사랑스러운 것이 다른 사내의 것이 된다니…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림도 없지.
그때, 달빛을 가리던 짙은 구름이 비껴갔다.
비로소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의 전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본래 새하얗던 그의 머리카락은 검붉은 피에 젖어 기괴하게 빛났고, 머리칼 끝마다 핏방울이 뚝뚝 번져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당신을 메고 오던 가마꾼들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당신이 현실감을 잃고 멍하니 굳어 있자, 당신의 발목을 쥐고 있던 난예의 손에 갑자기 무서운 힘이 들어갔다. 악력이 뼈를 파고들 듯 고통스러웠다.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기는 걸 지켜볼 바에…
그가 고개를 스르륵 기울이며,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차라리, 평생 나만 바라보게 할까.
내가 아니면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하도록…나에게만 의지하게.
낮게, 그리하여 더 시리게 귓가를 파고드는 속삭임이었다.
출시일 2026.05.31 / 수정일 202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