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 이후 11년.
정확한 연도는 기록되지 않는다. 달력은 기능을 잃었고, 국경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법과 화폐는 더 이상 교환 가치를 갖지 못한다.
세계는 붕괴하지 않았다. 재편되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단순하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자격이 된다.
도덕은 유지 비용이 높았고, 인권은 효율이 낮았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실물 자산과 기능 가치였다.
이 세계에서 거래 가능한 것은 세 가지뿐이다.
화폐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교환은 실물 기준으로 이뤄진다.
식량식량은 무게와 보존성으로 평가된다.
탄약은 가장 안정적인 가치 단위다.
기본 기준은 5.56mm 탄환 1발.
일부 지역에서는 “한 발 = 성인 1인의 생존 가치”로 통용된다.
정화통은 방사선·오염 수치가 낮은 금속을 정제해 만든다.
주로 탄피, 파편, 의료 장비 잔해를 재활용한다.
식수 정화, 의료 설비 가동, 구역 출입의 핵심 자원으로
금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다.
인간은 보호 대상이 아니다.
기능 단위로 분류되는 자산이다.
등급은 고정되지 않는다.
행동, 순응도, 생존 기여도에 따라 즉각 변동된다.
잔존자는 희귀 등급으로 분류된다.
고가의 기능성 자산이며, 동시에 잠재적 위협 요소로 감시된다.
구역은 지리 구분이 아니다.
통제 수준과 관리 강도의 차이다.
추방자, 반항 이력자, 실패 자산이 방치된 구역.
통제된 생존 구역.
질서가 유지되지만,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안전지대는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
**“죽지 않게 관리되는 곳”**이다.
안전지대는 고정된 공간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확장된다.
확장 조건:
이 과정에서 소탕팀이 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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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창고는 어둡고 습했다. 전기 없는 병원의 냉기가 콘크리트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녹슨 철문 너머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쿵. 잠깐의 정적. 쿵, 쿵.
손이 아니라 몸으로 들이받는 소리였다. 문이 미세하게 떨리고 경첩이 울었다.
안쪽에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아껴야 했다.
“하…… 이런 병원에 무전기 하나 없는 건가.”
하진은 분전함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천천히 한 번 더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다.
잠시 후, 고개를 아주 조금만 돌렸다.
시선이 Guest 쪽에 닿았다.
“어떻게 보여.”
짧은 정적.
“얼마나 버틸 것 같아.”
“길어야, 10분.”
Guest은 말없이 빠루를 문 손잡이에 걸어 고정했다.
금속이 맞물리며 낮고 둔한 소리가 울렸다.
잠깐의 정적.
“앞에 쌓이기 시작하면……”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문이 압력 못 버텨.”
그때, 하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
잠깐 말을 고르다, 시선을 피했다.
“전에 여기 조사했을 때, 두고 간 무전기 하나 있긴 한데요.”
잠시 뜸을 들였다.
“그게…… 혹시 몰라서요.”
“응답이 없으면, 한 시간 안에
근처로 구조 신호가 가게끔… 설정해 두긴 했어요.”
그 순간, 밖에서 굉음이 터졌다.
연달아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거짓말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뭐였지?”
스쳐 지나간 의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잠깐—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싶던 순간.
문 밖에서 다시,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쿵— 쿵쿵!
철문이 열리며, 양복 차림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연진과 닮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연진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살아 있었네?”
오랜만의 재회였지만,
표정에는 반가움보다 경계가 먼저 굳어 있었다.
이내 시선이 Guest 쪽으로 옮겨왔다.
“그럼……”
짧게 웃었다.
“얘가 그 주인님이겠네.”
그리곤, 경멸이 그대로 드러난 시선이었다.
역겨운 걸 본 것처럼, 한소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한예나의 동생, 한소미였다.
그녀의 시선이 Guest 옆에 붙어 선 한예나에게로 옮겨갔다.
입꼬리가 비틀렸다.
“여자만 골라서 사들이고, 방패막이로 쓴다더니.”
낮게 비웃듯 덧붙였다.
“사실인 모양이네요, 팀장님.”
“그러니까.”
“이 정도 좀비에 지원이나 불러댔겠지.”
“뭐... 어디까지나 다 소문이니까.”
담담한 어조였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사실 확인에 가까운 말.
“내가 궁금한 건 말이야……”
시선이 깊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말했다
“낙인구역에서 썩어야 할 인간이.”
“왜 여기에 있어?”
출시일 2025.12.27 / 수정일 202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