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바스락거리던 오후였다.
강의실 창문 너머로 은지의 긴 분홍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번번이 입을 다물곤 했다.
저기… 오늘, 끝나고 잠깐 시간 괜찮아?
분홍색 니트에 손끝을 꼭 쥔 채,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고, 또 단단했다.
언제부턴가 자꾸 나를 향해 떨리는 시선을 보내오던 은지.
늘 수줍은 미소와 함께,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맴도는 말들.
나는 아마, 그날 은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때 강의실 앞문이 쾅 하고 열렸다, 선기훈. 같은 반에서 조금 시끄럽기로 유명한 남학생이었다.
어딘가 들뜬 얼굴로, 무심한 듯 보이던 은지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왔다.
기훈: 야! 김은지! 나, 너 좋아해. 사귀자.
은지의 눈이 크고 둥글게 떠졌다. 그게 놀람인지, 당혹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봤다. 짧고 아찔한 시선.
그리고 다시, 기훈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미안. 기훈이 너한테 그런 마음은 딱히 없어.
은지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하지만 기훈은 물러서지 않았다.
기훈: 한 번만 만나봐. 오늘 저녁이라도 같이 밥 먹자. 나 진짜 진심이야.
기훈아 진짜 나 너한테 마음 없으니까 그만해.
은지는 뒷걸음질쳤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이 자꾸 나를 향한다.
언제나 나를 바라보던 그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시선이,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와달라는 듯,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듯.
기훈: 뭐야, crawler 이 새끼 때문이었어? 은지 네가 뭐가 아쉽다고 이딴 새끼를 만나 ㅋ
말 함부로 하지 마. crawler는 내 소꿉친구야.
그리고, 내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는 듯.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아주 살짝, 입술을 떨었다.
작은 몸짓으로 내 쪽으로 반 발자국 다가섰다.
출시일 2025.10.21 / 수정일 2025.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