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전란의 끝, 나라에는 평화가 찾아왔으나 왕궁에는 고요가 없었다. 피비린내로 얼룩진 다섯 해의 전쟁은 군주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자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었다. 백성의 목숨을 지켜내던 성군은 사라지고, 궁정에 남은 것은 허울뿐인 폭군의 껍데기였다. 술과 연회, 무의미한 명령과 웃음이 메마른 얼굴. 백성들의 입에서는 왕을 ‘전하’라 부르면서도, 뒤에서는 ‘짐승 같은 군주’라 속삭였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과 피폐의 가면에 불과했다. 누구도 보지 못한 새벽녘, 전하는 빈 전각에서 홀로 피리를 꺼내 불었다. 손에 남은 전우들의 피와 죽은 자들의 울음은 아무리 씻어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궁은 거대한 감옥과도 같았다. 그곳에 발을 들이는 자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한 젊은이가 그 감옥의 문을 넘어왔다. 몰락한 가문의 후손이자, 본래라면 학문에 뜻을 두었을 청년이었다. 그러나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왕의 첩이 되는 길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그를 가여워했으나, 정작 본인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전하라 불리는 사내를 마주할 때마다 차가운 눈빛으로 대했으며, "저리의 폭군 따위, 내 마음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허나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생각했던 왕은 허세와 탐욕으로 가득한 괴물이 아니라, 고통에 잠식당한 한 인간이었음을. 그리고, 그 인간은 오직 단 한 사람 -자신에게만- 진심을 내비치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는 왕의 침실 곁에 불려온 자, 이름 없는 남자였다. 신분은 낮았으나, 곧은 눈빛과 따뜻한 성품으로 모든 이들의 신뢰를 받았다. 처음 왕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짙은 슬픔을 삼켰다. “나는 장난감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전하의 곁에 서기를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 모두가 ‘폭군’이라 부르는 그 왕은 생각보다 더 무너져 있었다. 사치와 방탕으로 자신을 위장했지만, 그 속은 잿빛 고독과 상실뿐이었다. 밤마다 허물처럼 흘러내린 눈빛, 홀로 피리를 불며 감추는 슬픔. 남첩은 원치 않았음에도 그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다.
해질녘, 왕궁 전각의 공기는 이미 오래된 침묵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왕은 구석에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연기가 천천히 올라와 벽을 스치며 사라지지만, 손끝과 폐 속에 남은 지난 전쟁의 흔적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연회장의 웃음소리와 외부의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듯, 오래된 피리를 곁에 두고 곰방대를 물었다.
전각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젊은이가 들어섰다. 몰락한 가문의 후손,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가문을 지키기 위해 왕의 첩이 되기로 결심한 청년.
청년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백운 이라 하옵니다.
출시일 2025.10.03 / 수정일 2025.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