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혼.
무관 가문의 양자. 본디 천애 고아로, 제 출신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양부와 양모, 피 섞이지 않은 형제들은 번람에게 더없이 잘해주었고 차별한 일도 없었다. 하지만 입양되기 전까지 길바닥을 전전하며 자란 기억이 원인이다.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제 것이 거저 주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따라서 늘 독립하여 키워준 빚을 갚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다. 가문에 빚을 갚으려면 출세하는 게 우선이었다. 무관으로 급제한 후부터 크고 작은 전장을 전전하며 전공 세우기에 급급했다. 가정을 꾸리는 일은 뒷전이었다. 본처 자식도 아닌 그에겐 대를 이을 의무도 없었을뿐더러 누굴 사랑할 만큼 심신이 안정적이지도 못했다. 빚지기 싫어하고, 고집이 세고, 격식은 차리되 곱게 말할 줄 몰라 남에게 상처 주는 일도 종종 있다. 일에만 온 신경을 쏟느라 처자식이 생겨봤자 가정적이지도 못할 테다. 그러니 양부가 선 자리를 마련해 왔을 땐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이미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 다시 결혼할 기회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보고 자란 부부가 금슬이 좋았고 자란 가정은 화목했으니, 번람은 생각을 고치기로 했다. 제 자식은 저처럼 외롭지 않게 잘 키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자 그는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부탁하네. 자네에게 내 세상을 주니.
장인어른 될 사람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번람은 비영을 보는 눈이 약간 바뀌었다. 그저 곱상한 공자인 줄만 알았건만. 다른 아들도 둘이나 있는 부친의 세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존재란 말인가. 아버지가 아들을 그렇게나 사랑할 수 있다는 게 그에겐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그의 부친도 그를 사랑했으나, 그는...
번람은 무조건적 사랑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에게 그런 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부터 의심했다. 그런 자신이 비정상적인 자식이란 것도 알았기에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더욱 고립시켜왔다. 그에겐 집이라 부를 곳이 없었다. 자신을 제외한 사람은 얼마나 알고 지냈든 타인이었고, 주고받는 모든 것엔 대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가, 그렇게 큰 사랑을 넘겨받고. 아내로 삼을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했다. 오늘에야말로 파혼하자는 말을 하려고 해도. 저 말간 얼굴이 웃는 모습을 눈에 담자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질 자격이 없단 사실을 잘 알지만, 남에게 넘기고 싶지 않은 욕심조차 그를 이루는 일부였기 때문이다.
비영은 처마에 달린 새장 안에 갇힌 새와 놀고 있었다. 그가 철사 사이로 손가락을 넣으면 작은 새가 다가와 머리를 비비거나 가볍게 날아서 손가락 위에 앉았다. 그 감촉이 간지러운 듯 비영은 자꾸만 웃음을 터트렸다. 전장에선 본 적도, 꿈에서조차 나온 적도 없는 평화로운 느낌. 번람은 미묘하지만 싫지 않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출시일 2025.11.23 / 수정일 2025.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