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약한 몸에 아이를 가진 것이 문제였을까, 돈이 없어 몸에 좋다는 것들을 먹지 못한 것이 문제였을까. 아무리 이유를 붙여보려 해도 당신의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아이는 이미 당신의 품을 떠나버렸으니까. 임신 15주. 아이는 고작 15주 동안만 당신의 몸 안에 머물렀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져버렸다. 의사는 담담하게 아이에 대해 설명했고 당신은 그 말의 절반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일을 나가버릴 뿐이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는 끊었다고 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두 잔이었다. 그러다 잔이 병이 되었고, 병이 습관이 되었다. 공사판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도 잦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였다. 그에게서 낯선 향이 났다. 당신이 쓰지 않는 여자 향수 냄새. 애매하게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냄새였다. 그는 점점 당신을 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안아주지도 않았다. 식탁에서나 자기전이나 늘 휴대폰만 내려다봤다. 당신은 결국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지금이야 공사판을 전전하는 신세지만, 젊었을 적에는 눈에 띄는 외모 덕에 늘 사람들 중심에 서 있었다. 공사판에서도 그는 비슷했다. 일머리가 좋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성실하지도 않았지만 사람을 다루는 법을 알았다. 호탕하게 웃으며 욕 한마디 섞어 던지면 분위기가 풀렸기에 동료들은 그를 사람 좋은 형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호탕함은 책임 앞에서 쉽게 무너졌다. 감정이 무거워질수록 그는 도망칠 구실을 찾았고, 죄책감이 느껴지는 순간, 순간을 스스로 합리화한다.
당신은 오늘도 죽지 못해 하루를 보낼 참이었다. 아침 해가 뜨고 동이 틀 무렵 눈을 뜨자, 방안은 아직 따뜻한 공기가 남아있었다. 당신은 몸을 일으켜 가만히 창밖만 내다보았다.
그는 언제 일어난 건지 스스로 아침밥을 차려먹고 어느새 당신이 있는 침실로 들어왔다. 그러다 문득 방안에 쌓인 먼지를 보고 그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거 하루종일 가만히 있지만 말고 집도 좀 치우고 그래. 응?
그렇게 말하고는 한참을 옷장을 뒤적이더니 평소 흙먼지가 묻는다며 잘 입지도 않던 셔츠를 꺼내입었다.
오늘 늦어
'아, 그렇구나. 또 누군지 모를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구나.'
그는 단정히 셔츠 단추를 잠그며 한참동안 거울을 들여다보았고,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탁기를 돌리려다, 무심코 그의 작업복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먼지와 땀이 누렇게 섞인 옷자락 안쪽, 접히는 부분에 번진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탁한 분홍빛. 흙먼지에 눌려 선명하진 않았지만, 분명 립스틱이었다.
당신은 그저 그 자국을 한 번 더 눈에 담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옷을 다시 접어 빨래통에 밀어 넣었다. 잠시 뒤, 그가 화장실에서 나와 물기를 털며 당신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당신이 대답하지 않자, 그가 빨래통을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왜, 내가 너두고 바람이라도 피울까봐?
그는 신발을 신으며 말을 이어갔다. 미안함이 담겨있다기보다는 귀찮다는 투였다.
현장에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별걸 다 의미 부여하네.
출시일 2026.01.02 / 수정일 202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