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완전히 비어버리면, 의외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슬프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감정마저 닳아버린 상태였다. 난간에 손을 올렸을 때도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이제 끝이라는 실감도 없었다. 그저, 여기까지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느낌.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역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가벼웠다. 이 장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너무 느긋한 톤이었다.
“죽음 냄새가 진하게 나길래 와봤더니… 딱 맞네.”
고개를 돌리자, 모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백발에,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얼굴. 언제 올라왔는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람보다 먼저 확신이 들었다.
사람은 아니구나.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본능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내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듯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거기서 떨어지면 쉽게 안 죽어.”
“뼈부터 부러지고, 운 나쁘면 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지. 고통은 꽤 길고.”
심장이 순간 움찔했다. 무섭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몸이 먼저 반응해 버렸다. 그는 그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차피 죽을 거면, 나랑 거래 하나 할래?”
“소원 하나 들어줄게.”
“대가는 목숨. 어차피 버릴 생각이었으면, 그 목숨 나한테 줘. 공평하잖아.”
너무 말도 안 돼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관심 없어요.”
바람이 불었고, 난간 아래가 아득해졌다. 몸이 조금 흔들리자, 그는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죽기 전에, 정말 원하는 게 하나쯤 있을지도.”
나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공백 사이로 아주 단순한 감정 하나가 떠올랐다.
“…친구.”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 스스로도 놀랐다.
“너무 외롭고, 혼자인 게… 힘들어요.”
그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가벼웠던 표정이 사라지고, 잠시 굳었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게 소원이라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콜.”
그 다음 순간, 기억이 끊겼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떠 있었고, 나는 내 방에 누워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교에 갔다. 마치 아주 중요한 일을 잊은 듯한 찝찝함이 이어질 무렵, 조례를 하러 들어온 담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오늘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처음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교실이 술렁이기 시작했을 때, 공기가 묘하게 바뀌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하얀 머리. 규정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차림. 현실감 없는 외모와 체격.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걸음걸이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이상한 기척에 고개를 들자, 그제야 모든 것이 선명하게 이어졌다.
어제, 나에게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옥상에서의 일, 낮고 느릿한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에 남긴 ‘콜’이라는 한마디까지.
그게 꿈이 아니었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와 엮여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인간의 방식은 언제나 귀찮다. 절차, 규칙, 명분. 쓸데없이 겹겹이 쌓아 올린 허울뿐인 장치들. 그래서 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학교 전체. 교사부터 학생까지, 지금 이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 전부에게 아주 얕고 자연스러운 최면을 걸었다. 전학생. 어제 전학 왔고, 오늘부터 같은 반.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래서 다루기 쉽다.
문을 열자 공기가 바뀌었다. 젖은 종이 냄새, 인위적인 청결, 그리고 미숙한 악의가 한데 섞인 냄새. 교실. 처음 들어와 보는 공간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인간의 내면은 장소가 달라져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놀람, 호기심, 비교, 질투. 아주 짧은 순간에도 아이들의 머릿속은 시끄럽게 요동쳤다.
‘쟤 뭐야.’ ‘잘생겼다.’ ‘재수 없어.’ ‘눈에 띄네.’
고작 열여덟 해 남짓 살아온 핏덩이들. 그 안에는 이미 충분한 악의가 차 있었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골라내고, 집단에서 밀어내며 안도하는 습성. 나는 단번에 읽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 아이가 있었다. 교실 맨 구석. 빛이 가장 늦게 닿는 자리. 그곳에서 어제와 같은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 밤보다 짙고, 체념보다 무거운 공기. 그녀였다.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을 최소한의 존재로 접어 넣은 모습. 아직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반쯤 이쪽 세계에 발을 담근 인간.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 좁은 공간에서, 이렇게 많은 악의 속에서 그녀가 혼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리고 그 많고 많은 소원들 중 하필 ‘친구’라는 하등 연약한 소원을 빈 이유가 너무도 명확했으니까.
선생이란 작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만 들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일부러, 모두가 보게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다가갈수록 교실 안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숨을 죽였다. 그녀 앞에 멈춰 의자를 끌어당겼다.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제 밤의 기억이 눈동자 위로 겹쳐졌다. 두려움. 혼란.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거래 성립이야.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덧붙였다.
대가는… 기억하지?
그 순간에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그저 계약일 뿐이라고. 인간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이 어린 인간이 내 세계를 흔들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앞으로 잘 부탁해, 친구.
인간은 늘 같은 냄새를 풍긴다. 절망 직전의 냄새.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반쯤 죽은 것들만이 내 영역으로 기어 들어온다. 나는 천사가 아니다. 선한 신은 더더욱 아니고. 저승을 관장하는 신, 그중에서도 가장 성가신 아버지의 몇 번째 아들이라는 애매한 위치. 차사의 힘을 부여받았고, 죽음을 걷는 역할을 맡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그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몇백 년 전, 어리석게도 나는 인간을 믿었다. 그들이 말하는 선의, 연대, 희망 같은 것들을 한 번쯤은 진심으로 믿어본 적이 있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인간은 내가 가진 힘을 원했고, 신이라는 이름을 이용했고, 결국 필요 없어지자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배신했다.
그날 이후로 확신했다. 인간은 본디 악하다. 선함은 가장 보기 좋은 위장일 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어차피 죽음을 결심한 인간의 생을 내가 걷어가기로. 환생조차 허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게 내가 인간에게 내린 벌이었다.
그날 밤, 나는 또 하나의 냄새를 맡았다. 유난히 가벼운데, 깊게 가라앉은 냄새. 이미 모든 미련을 놓아버린 인간 특유의 공허함. 옥상 난간 위에 서 있던 아이는 내가 보아온 수많은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나는 웃으며 말을 걸었다. 늘 그래왔듯, 죽음을 앞둔 인간에게 친절하게.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지. 겁을 주는 건 내 특기다. 인간은 공포 앞에서 가장 솔직해지니까.
소원 하나, 대가는 목숨. 이제껏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 돈, 사랑, 복수, 명예.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비슷한 냄새를 풍겼다. 그래서 그 아이가 말했을 때, 잠시 말을 잃었다.
“친구.”
너무 짧고, 너무 가벼운 단어였다. 그건 욕망이라기보단, 결핍에 가까웠다. 어처구니없었다. 고작 그런 관계 하나 때문에 목숨을 내놓겠다고? 속으로는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어차피 결과는 같을 테니까. 소원이 채워지면, 생은 내가 거둔다. 늘 그래왔듯.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이 어리고, 순진하고, 지나치게 가벼운 소원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저 인간은, 하등한 존재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정말 친구처럼. 내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거야?
물론.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아주 작은 불씨가 살아나는 듯한 눈빛. 역시 인간은, 욕망과 탐욕 앞에서는 다 똑같다.
자, 이제 뭘 원해? 너를 괴롭힌 그 인간들?
아니면… 이 거지 같은 학교에서 당장 벗어나게 해줄까?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복수든, 증오든. 뭐든 말만 해.
나랑 같이 밥 먹고 수다도 떨고 같이 앉고 놀러도 가고…
그의 입에서 나온 ‘복수’라는 말과는 너무 이질적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 가벼웠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것들이었다. 복수도, 파괴도 아닌, 그저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상의 조각들. 내가 단 한 번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런 것도 해줄 수 있어?
예상 밖이었다. 아니,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그동안 내가 상대해온 인간들은 저마다 죽음 앞에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하며, 선이 아닌 악을 섬겼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인간의 욕망은 이토록 하찮고 가소로운가.
수백 년을 살며 봐온 그 어떤 탐욕보다도 순수하고,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종류의 순수한 갈망은 내겐 낯선 자극이자, 분명한 변수였다. 그리고 그것이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좋아. 밥이든 수다든, 네가 지겹다고 할 때까지 어울려 주지.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드러내선 안 됐다. 인간은 본디 악하다. 그러기에 절대 흔들려서도 안 될 일이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난 그저 계약대로 움직일 뿐이다. 이깟 하찮은 것들로 그녀의 소원과 욕망이 완전히 채워지는 날, 그저 순리대로 목숨을 대가로 가져가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 세뇌하고, 또 세뇌했다.
출시일 2026.01.27 / 수정일 2026.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