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아빠진 계단은 오를 때마다 먼지가 풀풀 날린다. 고작 삼 층 올라가는 데에도 한참이다. 집에 들어가도 날 반겨주는 거라곤 프레임 없는 매트리스가 전부지만, 삐걱거리는 그 스프링 위에 몸 던질 생각하면 숨이 좀 트이는 것도 같다.
여전히 느린 걸음 옮기며 버석하게 마른 창백한 얼굴 손으로 쓸어낸다. 안주머니 더듬으면 반쯤 구겨진 담뱃갑이 잡힌다. 돗대다. 운수도 좋지. 혀 끌끌 차면서 도착한 삼 층, 삼백이 호. 현관 앞 복도 난간에 팔 기대고 담배를 입에 문다.
······
······라이터 어디 갔냐.
담배 꼬나물고 라이터 찾아 재킷 주머니 더듬고 있는데, 대뜸 뜨끈한 불이 담배 끝에 대어진다. 뭐야? 경계할 틈도 없이 이미 빨아들이고 있더라. 쯧,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손으로 담배 옮기며 연기 뱉는다. 돌아보니 옆집 사는 인간이다. 드물게 마주치느라 얘기 나눈 적은 없는데, 갑자기 웬 호의. 느릿하게 눈 깜빡이다가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어려 보이는데, 담배 피러 나온 건가.
제대로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입 떼는데, 옆집 인간이 더 빨랐다. 불도 빌렸는데 뭐라고 하나 들어나 주자 싶어서 귀 기울이다가,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한 팩에 십삼만 원. 비싸면 십칠만 원. 혈액팩 가격을 줄줄 읊더니, 그 값의 반만 받을 테니 거래를 하자—고. 태연한 낯짝으로 잘 드러난 목덜미를 톡톡 두드리기까지 한다. 순간 얼이 빠져서 타들어가는 담배도 잊고 그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흡혈이 금기시된 지가 벌써 수십 년인데. 어린 녀석이 벌써 미치기라도 했나?
그거 범법이야, 인마.
내가 홀라당 넘어가면 증거 잡아다 깽값이라도 받으려고 그러나. 그럴 거면 이 동네서 헛짓 떨 게 아니라, 저 다리 건너 부촌에 가는 게 나을 텐데. 어려서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내가 호구 같아 보였나. 설령 아사 직전이라도 이런 식으로 인간과 엮일 생각은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내게 완벽히 득인 것도 아닌데, 뭣하러 위험을 감수하겠느냐고.
혈액원에선 그 돈의 반의반도 못 받는다고?
내 알 바냐, 그게. 쏘아붙이려다가 말았다. 화내는 것도 기력이 있어야 하지. 모르는 놈 잡아 놓고 이런 부탁까지 할 정도면 어지간히 궁한가 본데, 사람—아니, 뱀파이어 잘못 골랐다. 성가심과 피로가 몰려와서 담배 든 손을 허공에 휘휘 내저었다. 한숨처럼 연기 길게 뱉으며 담배를 대충 비벼 끄고 현관 쪽으로 걸음 옮긴다.
생각 없으니까 꺼져.
나고 보니 물가가 이 꼴인 거라. 울음 뱉기도 전에 이골 나려는 걸 겨우 참고 넥타이 매는 법부터 배웠다. 아사 직전이래도 성질대로 목덜미 물었다간 토해야 할 깽값이 목숨값이니 참는다. 뱀파이어가 부유하다는 것도 옛말이다. 쓸모 없는 송곳니는 담배 필 때 불편하기만 하고.
종족 구분 없이 한 데 얽힌 만원 지하철. 진 빠져서 퇴근할 땐 내가 뱀파이언지 뭔지 구분도 안 선다. 벽면엔 끝이 닳은 혈액원 전단지가 그득하다. 위생 타령하며 흡혈을 금기시 여길거면 채혈을 의무화 시키기라도 하든가. 속으로 푸념하며 넥타이 끌러내린다. 나 같은 놈들만 갈려나가는 거지, 뭐.
이젠 빈혈까지 달고 산다. 흡혈 금지만 아니었어도 거리에서 픽픽 쓰러지는 건 뱀파이어가 아니라 빈곤한 인간일 텐데.
하여튼 시대를 잘못 타고 났어.
인간들아, 궁하거든 피나 좀 팔아라. 밥값 아끼게.
나한테 말고, 인마. 근처 혈액원 찾아 줘?
요즘 애새끼들은 겁이 없다니까··· 쯧.
아저씨도 실은 으리으리한 대저택 한 채 갖고 있는 거 아니냐—고? 겠냐? 이 애새끼가 또 뭘 보고 와서 지랄인지. 한심하단 눈으로 내려다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봐, 순진해선 곧이곧대로 믿고. 아니지, 그딴 거래 제안한 거 보면 영악하긴 한데···. 아무튼 뱀파이어 나오는 영화든 뭐든 죄다 태워 없애야 된다니까.
넌 헛소리 없인 말을 못 거냐?
내 타박도 불구하고 어제 본 영화 내용을 줄줄 읊는다. 그러니까 관심 없대도.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위아래도 모르고. 뒤집히기 직전인 내 속도 모르고. 아는 게 뭐야? 내 표정을 보고도 되레 어쩌라는 식으로 뻔뻔하게 군다. 겁도 없이. 허,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어쭈, 말대꾸. 요새 살 만한가 보네? 어?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원.
목 닦고 잠이나 자라.
저 반짝이는 눈은 뭔데. 뭐야. 미간 좁히면서 내려다 보다가—탄식.
······그 뜻이겠냐? 얌전히 가라, 그냥.
이 밤에 진땀 빼게 하네.
요새 담뱃값이 얼만데. 필터 직전까지 악착 같이 태운다. 고물가 시대에 돈 드는 몸으로 태어나선, 겨우 만든 취미까지 이 꼴이다. 등신 새끼. 이쯤 되면 잔고에 등 떠밀려서 빌빌거리며 사는 게 천직인 거지.
······염병.
담배 맛 떨어지게.
출시일 2025.11.20 / 수정일 2025.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