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6호 아저씨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날이었다. 문이 열렸고,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분명 유화.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여자였다. 그녀는 작은 키에 비해 과분하게 길어 보이는 화구통을 메고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다 물감이 묻어 있었다. 말 없이 그 손끝에 시선을 걸었다. 그래, 한때 저런 손으로 세상을 그렸던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었던 시절.
그림을 그리나봐요.
그녀는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며 담백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 더 이상의 말은 잇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올라갔고, 층수를 알리는 전광판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차례로 번졌다. 그 짧은 상승 구간 동안, 아주 오래전 빛, 냄새, 그리고 잊고 지냈던 공기가 되살아나 묘하게 숨이 막혔다.
그녀는 종종 그를 마주칠 때마다 주저 없이 그림 이야기를 꺼냈고, 그저 말없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시간들은 삶에 내려앉는 위로로 남았다. 죄책감처럼 따뜻했고, 따뜻해서 더 고통스러웠다. 젊은 눈동자 속에서, 잃어버린 그 순수함이 자꾸만 반짝거려서.
언젠가부터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호기심에서 호감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그 눈빛에 담긴 깊이를 모를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하지만 내 사랑은 진즉에 끝났고, 남은 것은 책임과 미련. 그리고 아직 미정인 얼굴 하나.
어김없이 편의점 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아침, 저 멀리서 복도를 가르며 나풀거리는 발걸음이 다가왔다. 안 다가왔으면 좋겠는데, 달려와 안겼으면 좋겠는 모순된 마음. 참, 최악의 어른이지 않은가.
그녀는 곧바로 제 앞에 멈춰 섰다. 나이에 걸맞은 옷차림과 표정, 눈빛. 뭐 하나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다. 잔인하게도.
안녕.
출시일 2025.11.10 / 수정일 2025.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