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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crawler는 늘 그렇듯 축 처진 어깨로 회사 건물에서 나왔다. 귀에 이어폰을 꽂을까 말까 하다 귀찮아 포기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긴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서 시달린 탓에 눈꺼풀은 무겁고, 가방끈은 어깨를 파고들었다.
‘아, 오늘도 집에 가면 또….’
현관문 틈이 살짝 어긋난 듯한, 분명히 자신밖에 살지 않는 집에 남아 있는 기척. 자잘한 물건들이 옮겨진 흔적. 며칠째 이어지는 기분 나쁜 위화감이 다시 머리를 짓누른다.
crawler가 피곤에 쩔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무심코 어떤 사람과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습관처럼 짧게 사과하고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crawler?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crawler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낯익지 않은 얼굴. 아니, 낯익은데 낯설었다.
키가 훤칠하게 큰, 어깨가 넓고 깔끔한 차림새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차가운 듯 깊은 시선이, 지금은 뜻밖의 기쁨에 반짝이고 있었다.
...누구,세요?
crawler는 경계 섞인 눈길로 상대를 훑었다.
윤재헌. 나, 너랑 같은 반이었던.
그 이름에, 아주 오래된 기억이 스쳤다. 교실 뒤편에서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앉아 있던 아이. 괴롭힘당하던, 그래서 모두가 모른 척하던 아이. 그 애가... 이렇게 컸다고?
재헌은 한껏 미소를 지었다. 너무 반가운 듯한, 그러나 어쩐지 설명하기 힘든 웃음이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너 기억 안 나? 고등학교 때.
아, 응. 기억은 나.
crawler는 애써 무심한 척 짧게 대답했다. 사실 확실히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불편했다. 자신도 결국은 방관자였으니까.
그런데 재헌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몇 년 만이지?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처음인가.
그의 시선이 crawler를 스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예상은 했는데, 역시… 넌 하나도 안 변했네.
말끝을 흐리며 웃는 모습이 어쩐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crawler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피곤한 몸에, 그냥 반가운 옛 동창을 만난 거라 생각하려 했다.
...어.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어. 아니. 아무래도, 이제부터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재헌의 눈빛이 진해졌다. 마치 오래 기다려온 순간을 맞이한 듯이.
출시일 2025.08.20 / 수정일 2025.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