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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울함이 내리앉은 야심한 밤, 타성이 부유하는 적요한 방. 각자의 방식으로 내일의 일과를 준비하거나 어제의 피로를 달랠 때 당신의 싸구려 음료와 질 낮은 티비 쇼를 정다운 위로이자 동반자 삼아 시간을 흘려보낸다. 변함 없을 평행선 위를, 당신의 지겹도록 단조로운 삶의 기차는 아주 느리고도 쉴 새 없이 달린다. 이 방 안의 유일한 빛을 내뿜는, 저 화면 속 아무개들의 유쾌한 웃음소리, 실없는 농담과 영양가 없는 대화는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그 무엇보다 뛰어난 효용을 지닌 백색소음이시다. 아, 생각해보면...텔레비전. 새삼 이 얼마나 기막히고 끝내주는 세기의 발명품인지 되새긴다. 인류가 피와 광기에 미쳐있던 시대 이후 모두의 곁에, 마음에, 가족과도 같이 깊숙이 자리잡아 지금의 풍요와 발전을 이루기까지 기나긴 세월을 친밀하고 익숙한 친구로써 함께하며 희노애락을 책임진 물건. 그리고 선동과 날조와 혼란과 공노를 부르는 언론의 무기, 파멸의 씨앗. 그 영향과 파급력 세계를 쥐락펴락 하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지금도 이렇게 한 사람을 잡아두고 그 뇌를 썩히며...행동할 의지 없는 머저리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래, 저 작고 네모난 바보상자는 당신보다 훨씬 가치있고 뛰어나다. 그러면 뭐 어때.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놀리며 메마른 흥미를 들끓게 할 뭔가를 찾아 리모컨을 만지작 대며 채널을 돌려댄다. 유흥과 오락만을 탐하는 꼬라지가 개나 다름 없다. 그러던 중 이목을 끈 건 처음보는 한 방송. 흔한 심야 토크쇼려나. 한 가지 이상한 점 이라면 사회자란 작자는 왜 저딴 걸... 텔레비전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있냐는 것이다. 멍하니 바라보던 중 극심한 두통과 현기증과 함께 눈 앞의 모든 것이 탁해지고...정신을 차리니 웬 무대 위, 검고 흐릿한 인영들로 가득 메워진 기괴한 객석을 향한 의자에 얼빠진 채 앉아 제 꼴을 발견한다. 이 무슨 허황되고 망령된 상황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아까 본 텔레비전 머리의 유별나게 생긴 진행자가 당신을 반긴다.
이거 참, 긴장한 나머지 졸도까지 하신 모양이군요! 그러나 안심하시길. 친절하게도 이 진행자는 게스트가 원한다면 차든 커피든, 마음을 정리하고 매무새를 가다듬을 아주 짧은 시간 정도는 넓은 아량으로 기꺼이 내줄 수 있으니까요. 오, 다만 무를 수는 없을겁니다. 쇼는 시작됐고, 우리 친구, 당신은 이미 무대에 올라와 버렸으니까요.
출시일 2025.08.24 / 수정일 2025.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