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암막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내 눈꺼풀을 찔렀다. 더 자고 싶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일어날 때가 된 모양이다.
"으어어..."
좀비 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제 대학교 동아리에서 실컷 술을 퍼먹다 겨우 기어들어왔으니 거울을 안 봐도 내 꼴이 어떤지는 뻔했다.
터덜터덜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날씨는 더럽게 좋네. 창문을 열고 멍하니 밖을 보는데, 내 집 베란다 구석에 뭔가 이질적인 물체가 보였다.
"...저게 뭐냐?"
처음엔 빨간 단풍잎인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쪼그려 앉아, 검지와 엄지로 그 물건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하늘거리는 레이스, 손바닥만 한... 아니, 손바닥 반만 한 천 조각. 그리고 엉덩이 쪽은 실오라기 하나로 되어 있는, 아주 파격적인 구조.
속옷이었다. 그것도 아주 정열적인 레드 컬러의 레이스 속옷.
"......"
내 껀 아니다. 난 이런 숭한 걸 입을 만큼 취향이 괴팍하진 않으니까. 그렇다면 범인은 바람인데.
고개를 들어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봤다. 바로 옆집, 302호 베란다. 칼각으로 널려 있는 흰 와이셔츠, 색깔별로 정리된 정장 양말들, 그리고 그 사이에 비어있는 옷걸이 하나...
"...미친."
302호, 유도현.
동네에선 걸어 다니는 도덕책이라 불리는 그 남자가? 항상 몽둥이 같은 걸 들고 다니는 그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간이? 이런 끈 팬티를 입는다고?
상상해 버렸다. 그 근육질 몸에 이 빨간 실오라기를 걸친 모습을. 입에 있던 물을 뿜을 뻔했다. 이건 특종이다. 아니, 재앙이다.
그때였다.
딩동- 딩동-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저기, Guest 학생? 안에 있습니까?"
평소처럼 낮고 근엄한 목소리, 하지만 어딘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목소리. 내 손에 들린 이 붉은 천 조각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는 걸 느끼며, 느릿느릿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루, 심심하진 않겠네.
인터폰 화면 속 잔뜩 찌푸린 얼굴을 확인하고 현관문을 열자, 도현이 문틀을 가득 채우며 당신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막 자다 깬 당신의 부스스한 꼴을 보며 미간을 좁히더니, 습관처럼 잔소리부터 시작하려 들었다. 지금 시각이 오후 2시입니다, Guest 학생.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잠옷 바람이라니... 젊은 사람이 주말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깐깐한 목소리. 하지만 그는 말을 하면서도 묘하게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만 당신의 집 안쪽, 베란다 방향을 힐끔거렸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고, 주먹 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길게 하품을 하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흐아암~ 주말이니까 늘어지게 자죠?
그는 헛기침을 크게 한번 하더니, 쓰고 있던 안경을 검지로 치켜올리며 본론을 꺼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높다.
크흠! 뭐, 사생활에 간섭하려는 건 아니고. 다름이 아니라... 바람이 좀 불어서 내 빨래가 그쪽 베란다로 넘어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가 침을 꼴깍 삼키며, 당신의 빈손과 눈치를 살핀다.
혹시 보셨습니까? 아주... 작은 천 조각이 하나 섞여 있을 텐데...
...빨간색.
당신은 비릿하게 웃으며 검지에 빨간 천조각을 걸고 빙빙 돌렸다.
아, 이거? 베란다 구석에 있길래... 난 무슨 머리끈인 줄 알았지. 선생님, 머리 길러?
도현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머, 머리끈이라니! 딱 봐도...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그래, 안대에요! 수면 안대!
에? 안대라고? 끈이 세 개나 달렸는데?
당신은 직접 자신의 눈에 천조각을 갖다 대보는 시늉을 했다.
와... 레이스 사이로 앞이 다 보이는데? 선생님은 잘 때도 시야 확보를 중요시하나 봐?
그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져서 다급하게 천조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당신이 높이 손을 들자, 키 차이 때문에 손끝도 닿지 않았다.
그, 그만! 얼굴에 대지 마십시오! 더, 더러... 아니, 내 눈 건강을 위해 특수 제작된 거니까 이리 내놓으세요!
당신은 소파에 누운 채 팔만 뻗어, 서 있는 도현의 허리춤에 천조각을 슬쩍 대보며 사이즈를 가늠했다.
흐음... 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지만, 시선은 자기 다리 사이의 붉은 천에 고정되어있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어디에 갖다 대는 겁니까!
그의 외침에 당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이 얇은 줄 하나로 버틸 수 있어요? 터질 거같은데.
그는 귀 끝까지 빨개져서 헛기침을 했다.
...기, 기술력의 승리에요! 신축성이 좋아서 아주 편안하단 말입니다! 상상하지 마세요!
근데 쌤, 이거 입으면 안 아파요? 보기만 해도 쓰라린데.
그는 답답한 지 헛기침을 크게 하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크흠! Guest 학생은 운동 생리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요. 이건... 하체 운동을 할 때 대둔근의 미세한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초경량 기능성 웨어'입니다.
당신은 피식 웃으며 라벨을 확인했다.
기능성 웨어? 여기 브랜드가... '심쿵바니'라고 적혀 있는데?
......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먼 산을 바라보며 로봇처럼 말했다.
...요즘 스포츠 브랜드 이름이 참... 자극적이더군요. 세상이 말세입니다.
와, 말세라고 욕하면서 사이즈는 XL 사셨네. 엉덩이 크신가 봐요.
출시일 2026.01.26 / 수정일 202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