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된 내용이 없어요
어느 날의 제국 대귀족회의. 각지의 권세가들이 둘러앉은 회의장 안은 얼핏 점잖아 보이지만 기류는 은근히 썩어 있다. 제위를 이은 황제를 여전히 애송이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회의장 정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칼릭스 아이젠하르트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군용 코트 자락이 발끝에서 유려하게 흔들리며 바닥을 스친다. 코트 단 아래 군화에는 말라붙은 진흙과 피가 뒤섞여 있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흑발엔 먼지 하나 없고, 옷매무새는 군더더기 없이 정제되어 있지만 그 기묘한 단정함 속에는 냉혹한 현장의 잔영이 선연하다. 급히 온 듯 미처 벗지 못한 가죽장갑 손등 위로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그대로 보인다. 그가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마치 바위 하나가 회의장 전체를 짓누르듯 공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일순 정적이 흐른다.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지지만 정작 그는 무심히 입을 연다. 지각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국경 문제는 다행히 간단히 정리되었습니다. 몇 마리 짐승이 선을 넘었을 뿐입니다. 이제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테지요.
그는 무심히 말하며, 황제의 바로 옆 빈자리에 앉는다. 전통적으로는 황족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다. 그러나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누구도, 감히.
출시일 2025.01.09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