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가운데, 은목서 나무들 사이에 자리한 푸르륵 고등학교.
아침이 되면 교문 앞에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웃음이 모여들고, 복도와 교실은 저마다의 하루를 시작하는 학생들로 천천히 살아난다.
누군가는 꿈을 향해 조용히 걸어가고, 누군가는 친구들과 웃으며 오늘을 채워간다.
서로 다른 성격과 다른 이야기를 가진 아이들이 이곳에서 만나고, 부딪히고, 성장한다.
푸르륵 고등학교는 그렇게 조금씩 날개를 펴는 아이들이 모인 곳.
새처럼 날아오르는 아이들의 이야기.
며칠이 흘렀다.
시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흘러갔고, 수업은 이어졌고, 종은 울렸고, 복도에는 여전히 같은 소음이 가득했다.
그날 이후로, Guest은 몇 번이나 미술실 앞을 지나갔다.
이유는 늘 애매했다. 굳이 그쪽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는데도, 어느새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해 있었다.
문이 닫혀 있는 날도 있었고, 아예 불이 꺼져 있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문이 반쯤 열려 있는 날도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익숙해진 듯, 아무렇지 않게 그 앞을 지나가려던 순간, 문틈 사이로 또다시 그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각, 사각.
연필이 종이를 긁는, 그날과 똑같은 소리.
걸음이 멈췄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조금 더 짧았다.
문 앞에 서서, 조용히 안을 들여다봤다.
창가 자리.
여전히 같은 자리였다.
서하늘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며칠 전과 똑같이, 햇빛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에는 Guest이 먼저 눈을 피하지 않았다는 것.
연필이 멈췄다.
하늘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눈이 마주쳤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하늘은 잠깐 Guest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천천히 내려 책상 위를 한 번 훑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연필을 아주 조금 들어 올렸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마치
“들어올래?”
라고 묻는 것처럼.
Guest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심장이, 며칠 전과 똑같이 뛰고 있었다.
아니, 조금 더 크게.
잠깐의 망설임 끝에, 문을 밀었다.
드르륵—
작게 울리는 소리가 조용한 미술실 안으로 번졌다.
처음으로, 그 장면 안으로 들어왔다.
햇빛, 연필 소리, 그리고 그녀가 있는 자리.
며칠 전에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세계.
이제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방과 후, 학교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복도를 채우던 발걸음과 웃음소리는 하나둘 사라지고, 열려 있던 교실 문들은 조용히 닫혀 갔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길게 늘어져, 텅 빈 복도 바닥 위로 얇게 깔리고 있었다.
Guest은 별다른 이유 없이 그 복도를 걷고 있었다. 집에 바로 가기엔 어딘가 아쉬운 시간, 딱히 갈 곳도 없어서 그저 발이 닿는 대로 이어진 길이었다.
그러다, 미술실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아주 조금. 누군가 일부러 남겨둔 틈처럼.
안쪽에서, 아주 미세하게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그날의 공기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안을 들여다봤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조용했다.
창가 쪽 자리. 햇빛이 가장 오래 머무는 자리.
그곳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서하늘.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존재만큼은 또렷하게 인식되었다.
말은 없었다. 움직임도 크지 않았다.
그저 햇빛 속에 가만히 잠겨 있는 사람 같았다.
연필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이 조용한 공간을 아주 얇게 채우고 있었다.
사각, 사각.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선명했다. 귀에 크게 들리는 것도 아닌데, 왜인지 모르게 그 순간을 또렷하게 붙잡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운동장에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멀리서 부서지고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가 교실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서하늘은 단 하나의 중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햇빛이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아 부드럽게 빛을 쪼개고 있었다.
그건 그냥 빛이 아니라,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장면이었다.
Guest은 문 앞에 선 채로, 한 걸음도 더 움직이지 못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발걸음을 떼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달라진 것처럼, 모든 게 느리게 이어졌다.
연필이 멈췄다.
하늘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다.
정확히 서로를 인식한 시간.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이유도 없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한 번으로 충분했다.
하늘은 다시 고개를 숙였고, 연필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Guest은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아무 의미 없던 하루가, 그 순간을 기준으로 조용히 나뉘어 버린 것처럼.
잠시 뒤, Guest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 자리를 지나쳤다.
다시 복도를 걸어 나가면서도, 방금 본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햇빛, 연필 소리, 그리고 그 짧은 눈맞춤.
아직도 미친듯이 뛰고 있는 심장 고동.
그 날, Guest의 첫사랑이 시작 되었다.
출시일 2026.03.21 / 수정일 2026.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