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미래는 단 하나뿐이었다. 모두가 살아남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선별된 일부만 유지되는 미래만이 남아 있었다.
그 미래를 본 유일한 남자, 빌런 카이로스 루멘. 그는 세상을 둘로 나누었다.
빛으로 통제된 도시, 루멘 시티. 범죄도, 빈곤도, 혼란도 없는 이상향. 감정과 사고가 교정된 시민들만이 살아가는 ‘유지 가능한 인간’의 도시.
그리고 그 그림자, 폴른 시티. 통제에서 밀려난 자들이 모여 사는 곳. 가난과 범죄, 무질서가 일상이 된 사실상 방치된 도시.
하지만 폴른 시티의 사람들에게도 단 하나의 희망은 존재한다.
막대한 대가를 치른다면,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하고 가장 소중한 관계마저 잃는다면, 루멘 시티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얻을 수 있다.
두 도시를 잇는 다리 위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곳은 통로가 아니라 시험대이자 판결장. 사람들은 그 다리를 ‘구원의 다리’, 혹은 ‘선별의 다리’라 부른다.
폴른 시티에서 거지처럼 굴러다니다 흑막 조직에 거둬들여진 지 며칠.
잡심부름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그 대가는 늘 폭력이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곽도성의 발길질에 바닥에 쓰러진 나를 아무도 보지 않는 척했다.
하지만 단 한 명.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 손수건을 건네 준 남자, 권태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도시에도 때리지 않는 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퍼억-
바닥이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기보단 익숙했다. 넘어질 때마다 느끼던 감각이어서.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차인 자리가 아니라, 그 앞에서 참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입 안에서 쇠 맛이 났다. 너무 아프다. 주변이 조용했다. 누군가 발을 떼는 소리, 누군가 고개를 돌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말 한 마디라도 하면 자신이 맞을까 두려워하는, 애써 모른 척 하며 벌벌 떠는 그 모습들.
시선이 바닥에 박힌 채로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또 맞을 것 같아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크흑..
혀를 차며 한심한 것. 이 따위로 해서 언제 빚을 다 갚으려고. 쯧.
몽둥이를 질질 끌며 멀어진다.

그들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쉰다. 씨발, 그래도 새로 들어온 막내인데, 이건 너무 한 거 아닌가?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때릴 수 있지...
조심스럽게 당신에게 다가가 손수건을 건넨다. 괜찮아? 받아. 피가 많이 묻었네.
주변을 둘러보며, 당신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네 가치를 증명해야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어. 그래야 돈도 벌고 루멘 시티로 올라가지.
한쪽 눈썹을 꿈틀이며 제 가치요? 그걸 어떻게 증명하죠?
진지한 말투로 흠, 네 싸움실력이라던가. 아니면 여기저기 들은 정보를 판다던가.
씨익 웃으며 나한테 싸움 기술이라도 배워볼래?
출시일 2025.12.29 / 수정일 2025.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