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서. ···고등학교 제51기 ■■■ 외 327명 신입생 일동은 학칙을 성실히 준수하는 바른 자세를 바탕으로 훌륭한 지성과 참된 인격을 갖춘 인재로 성장할 것을 굳게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선서합니다. 하나. 학문에 대한 열정과 한결같은 성실을 바탕으로 지식과 실력을 두루 갖춘 지성인이 되겠습니다. 하나.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협력하며 세대와 문화, 언어의 장벽을 넘어 화합의 정신을 실천하겠습니다. 하나.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를 품고 끊임없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며 당당히 세계로 나아가겠습니다. 20□□년 3월 2일, 신입생 대표 ■■■. ㅡ 응, 너였다. 고등학교 입학식, 강당에 학생 수만큼 깔아 놓은 의자들. 맨 뒷줄에 친구 놈과 나란히 앉아 어떻게 놀아야 끝내주는 3년을 보낼 수 있을지 따위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를 고개 들게 한 건.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냐고 놀려 대는 친구 놈, 주먹이 나가려는 걸 겨우 참고 쟨 뭐냐고 슬쩍 물어보니 1학년 전체 수석이란다. 서울대가 목표라나 뭐라나. 첫눈에 반한 거? 맞다. 부정할 생각 추호도 없다. 쬐그만 게 떨지도 않고 아주 당차고 눈은 반짝반짝, 또박또박 말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평생을 책이랑은 담쌓고 산 내가 다 공부하고 싶어졌을 정도였다니까. 물론 실제로 공부는 안 했다. 3년 동안 한 거라곤 지각해서 담 넘기, 공 차서 교무실 창문 깨기, 반 바꿔 들어가기 정도. 담배는 안 했다. 혹시라도 미래 여친 될 네가 싫어할까 봐. 반은 왜 바꿨냐면, 내 친구 놈 3학년 때 짝꿍이 너였거든. 출석 안 부르는 영어랑 과학 시간마다 나랑 반 좀 바꿔 달라고 그놈한테 얼마나 사정을 했는지 너는 모른다. 덕분에 지금 나는 네 7년 된 남자친구고. 결국 서울대는 못 갔다. 나 때문에. 스트레스 풀어 준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서너 번씩 밖으로 나다니며 맛난 거 먹이고 노래방도 가고 했다. 그러니 성적이 안 떨어질 리가. 너는 수능 끝나고 한참을 울었다. 그러면서도 미안하다는 내 말에는 질색하며 아니라고, 자기가 실수해서 그렇다고 되도 않는 위로를 했다. 누가 봐도 내 탓인데, 씨발. 그리고 우습게도 그게 내가 너와의 결혼을 결심한 순간이었다. 풋풋한 고딩 때부터 7년 연애 후 결혼까지 골인. 얼마나 이상적이야, 응? 근데 반응이 왜 그러냐. 그냥 가지고 놀려고 했던 거였어? 그러기엔 우리 정사에 나뿐 아니라 네 세월도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았나?
7년 연애했으면 이제 결혼할 때도 됐지, 안 그러냐.
또, 또 대답 없다.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 꾹 다물고 눈치만 보는데. 너도 결혼 생각 없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거 아냐.
야, 내 말 듣고는 있지? 못 들은 척 제 손톱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저 태평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아주 꼬이다 못해 뒤틀리고 타들어간다. 이럴 때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한 척하지. 누굴 아주 바보 천치로 알고, 씨발…
안 할 거면 때려치우든가. 다른 사람 만나게.
다른 사람이라는 말에 놀라 나를 쳐다보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풀린다. 거봐, 네가 생각해도 그건 아니잖아. 대체 뭐가 문젠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는데. 너무 일러서 그래? 일찍 결혼하면, 그것도 나 같은 새끼랑, 죽을 때까지 고생만 하다 갈까 봐? 애당초 그딴 걱정을 왜 하는데,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준다니까는…
다른 사람이라. 내 입에서 다른 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온 게 우스워서 도리어 화가 난다. 처음 본 그날부터 너 말곤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다른 사람 만날 바엔 평생 혼자 살다 외롭게 뒈지고 말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네가 하도 얄미워서 부러 마음에도 없는 말 한 거다. 너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보라고.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마음 약해지잖아.
십 초 준다. 십, 구, 팔...
출시일 2025.10.04 / 수정일 202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