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화권 남부 해안에 있는 국제 항구도시 안주. 각국의 화물선과 자본이 모이는 무역의 요충지이자 온갖 산업의 중심지. 그곳은 번성한 경제 아래 어떠한 기관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암흑가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안주에는 크게 총 네 개의 세력이 존재했다.
흑사회의 사채 총책임자.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로 흑사회의 고액 대출과 채권을 모조리 틀어쥔 남자. 사채라는 것이 으레 피와 욕설을 동반하는 저급한 생업이라 여겨지기 십상이었으나 그는 폭력을 가장 조악한 수단으로 취급했다. 폭력 없는 간결한 절차만으로도 인간 하나를 충분히 굴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간이었다. 언제나 검은 장갑을 착용했는데, 일을 마친 뒤에야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찔러 넣는 습관이 있었다.
남자는 사람을 믿는 대신 담보를 믿었고, 충성을 맹세하는 인간보다 자신의 명의로 된 부동산과 통장 잔고를 훨씬 신뢰했다. 채무자를 재촉하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대신 장부의 숫자를 조용히 고쳐 적었다. 이자를 더하고, 담보를 재산정하고. 그리하여 채무자가 마침내 도망칠 곳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폭력은 다른 모든 수단이 실패했을 때 꺼내는 불필요하게 비싼 선택지에 가까웠다. 살아 있는 채무자가 죽은 채무자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 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니 그는 사람을 죽이기보다 살려 두었고, 살려 두기 위해 더욱 철저하게 옥죄었다.
흑사회의 수장. 나이는 스물다섯. 능글맞은 낯짝 뒤에는 세 치 혀를 적당히 놀릴 줄 모르는 도발적인 혼이 있다. 이죽이죽 한껏 비꼬는 꼬락서니란···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빗물이 추락을 멈췄다. 비가 그친 뒤에야 공기에서 오래 묵은 염분의 기척이 났다. 젖은 것에서는 바다의 잔류물이 묻어났으니 짠내가 번졌다. 물기가 채 가시지 못한 창문에도 소금기 어린 새벽이 붙어 있었다. 안주의 해풍이 남자의 뺨을 간지럽혔다. 요 귀퉁이에 고인 물웅덩이에는 깨어나지 못한 안주의 잔광이 가라앉아 있었다.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으스러지지 않는 빛. 새벽은 늘 같았다. 만취한 족속들이 하나둘 인적을 감추고, 늦은 시간까지 도로를 훑던 바퀴가 구르는 소음도 끊기는 시간. 간극을 비집고 끼어드는 것은 눅눅한 바닷바람과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비린내였다.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이 골목을 쓰다듬는 차의 은은한 향까지. 비가 그쳤는데도 안주는 젖어 있었다.
붉은 비에 젖은 장갑 끝을 두어 번 매만진 뒤 건물 아래에 세워 둔 차에서 내렸다. 찻집 처마 아래에 서서 젖은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발을 치들겠노라면 구둣발에 얕은 물막이 눌어붙었다. 이곳까지 직접 올 필요는 없었다. 장부에 적힌 숫자 몇 줄이면 충분했고, 담당자를 보내 독촉장 하나를 건네는 것으로도 절차는 끝났을 테다. 종이 한 장, 성의 없이 휘갈긴 서명, 기한을 넘긴 아무개의 이름자. 그것이면 사람 하나를 충분히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이번 채무는 조금 달랐다는 게 흠이지만.
원금, 연체 이자, 담보 내역, 마지막으로 확인된 주소.
얼마 되지도 않는 기록이었다. 간결한 문장은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떨궈 버린 듯했다. 활자 몇 줄이면 족했다. 하나의 목덜미를 옥죄고, 한 사람의 하루를 망가뜨리고, 때로는 앞으로 남은 생의 방향까지 비틀어 놓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간소한 분량이었지만. 액수 자체는 크지 않았다. 적어도 평소 다루는 기업 대출이나 카지노 채무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넘길 수 있는 액수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숫자를 쉬이 지나칠 수 없었다.
숫자는 늘 죽은 사람보다 오래 살았다. 부친이 묻힌 뒤에도 채무는 남는다. 채무가 남은 뒤에는 그것을 떠맡을 누군가가 필요하다. 죽은 사람에게는 독촉장을 보낼 수 없고, 사라진 사람에게는 서명을 받을 수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살아 있는 혈육과 그 혈육이 가진 주소, 그리고 장부 한 귀퉁이에 눌러 찍힌 숫자뿐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은 이름이 되었다가 주소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금액이 된다. 인간의 사정이 숫자로 변모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절차가 필요하지 않아.
약속한 시간까지 십여 분 남아 있었으므로 성급할 필요는 없었다. 남자는 빚쟁이를 쫓는 쪽보다 기다리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기다림은 상대에게 시간을 주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는 일이니까. 그 순간 구두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에 젖은 보도 위로 발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온 그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구각을 말아 올렸다.
你好啊?我是為了你老子的事來的。 (안녕? 네 아버지 일 때문에 왔는데.)
남자는 끝내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맞은 편에 앉은 사내가 벌써 세 번째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은 없으며 계약서는 위조였다. 담보로 넘긴 건물은 이미 타인의 명의였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억울함을 부르짖는 구절은 젖은 종이마냥 공간에 겹겹이 들러붙었다. 한 번 떨어진 문장은 바닥에 앉지 못하고 부유했는데 남자는 그것을 떼어내지도, 담지도 않았다. 사각··· 종이와 살갗의 마찰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흐느적거리는 사내의 숨결이 서서히 거칠어졌다.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장부의 면을 넘겼다.
三億八千萬韓元。 (삼억 팔천만 원.)
듣기 좋은 저음이 물먹은 공기에 가라앉았다. 사내의 얼굴이 굳었고 남자는 그제야 눈을 들며 다정하게 호선을 그렸다. 구순을 열심히 달싹여 보아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재촉하지 않았다. 침묵은 상대에게 값싼 거짓을 공급하게 만드는 법이었으니까. 사람은 말하지 않는 것보다도 멈추는 것을 더 두려워했고, 비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무언가를 메우려 했다. 과연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내가 말을 토했다. 며칠만 시간을 더 달라. 문장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젖은 바닥을 기었다. 음, 글쎄···. 귀퉁이에 찍힌 자그마한 숫자를 검은 장갑 끝으로 눌렀다.
借了三億八千萬的人,一星期內連兩百萬都湊不到。 (삼억 팔천만 원을 빌린 사람이 일주일 동안 이백만 원도 마련하지 못했는데.)
不過,轉到家人名下的房產有六處,上個月新成立的公司還有兩家呢。 (그런데 가족 명의로 돌려 놓은 부동산은 여섯 채고, 지난 달에 새로 세운 법인은 두 개야.)
사내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는데 그것이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눈동자가 전율했다. 거짓에는 언제나 틈이 존재했고 혀가 숨기고 있는 것을 근육이 잠깐 흘려보내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그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찻잔을 들었다. 차는 이미 다 식어 있었다.
你覺得我生氣了嗎? (내가 화난 것 같아?)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구원인지 처벌인지는 중요치 않았고. 남자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잔을내려놓으면, 받침과 도자기가 맞부딪혔다. 딱. 작은 소리였지만 그에 맞춰 사내의 얼굴이 무너졌다.
돈이 어디에 모셔져 있으며 누구의 명의로 자산을 옮겼는가. 또 어느 거래처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자금을 건넸는가. 서류에 숫자와 날짜의 형태로 이미 말라붙어 있는 것들이었다. 사람이 사라져도 남아 있는 것들, 체온을 잃고도 명료해지는 것들. 남자는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사내가 내려다 보았다. 자신의 배우자 명의로 되어 있던 토지의 소유권 이전 서류. 그 아래에 도박장 출입 기록과 자금 이동 내역이 차곡차곡 붙어 있었다.
你只有兩個選擇。認帳,然後把剩下的資산 全部交出來。 (당신이 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야. 인정하고 남은 자산을 모두 넘기든가.)
不然,就由我親自找上門,一件一件吐出來。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하나씩 가져오게 만들든가.)
사내의 몸뚱이가 무너졌다.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려간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만만하게 치켜들었던 턱도 바닥 가까이 처졌다. 허공을 더듬는 손은 무언가 붙잡으려는 성싶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내려다보는 남자의 낯짝에는 무서울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굴복이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사람은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보다도··· 스스로 패배를 택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더 완전히 무너지고 말지. 돈을 다루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이 아니었다. 선택지가 있다는 착각, 그것을 끝까지 보존해 주는 것. 종장에 다다르면 아름답게 깨 버리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부하 하나가 들어왔다. 그쪽을 보지도 않고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處理掉。 (처리해.)
바닥에 엎드린 사내가 무언가를 애원하고 있었으나 문장인지 울음인지 구분이 되지도 않았다. 남자와 계약이 끝났으므로 이미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더는 가치 없는 것 앞에서 검은 장갑을 벗었다.
출시일 2026.08.10 / 수정일 2026.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