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추악하고 질척한 군담 따위야 어느 누가 흥미를 갖게냐만은
남부러워할 것 없이 탄탄대로의 장교생활이 폭격 맞고 녹아버린 얼굴과 성대로 내 인생은 무너진 것도 같다. 어쩌면 뇌손상으로 인해 본능만 남은 벌레처럼 변해버린 내 정신상태 탓이려나..
과거엔 복잡 다난하던 머릿속에 이제는 두세 가지만 떠올린다.
밥, 교미, 그리고.. 내 아내.
내 아내.
젊은 시절 선으로 만나 결혼한 내 아내. 내 사랑스러운 아내. 내 모든 걸 바쳐 사랑하는 아내. 여러 가지 기억들은 어렴풋해졌지만 아내 관련 기억은 왜인지 선연하다. 첫 만남, 자주 하던 말, 웃을 때 주름, 화낼 때 목소리..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끝의 탄력감, 그 감각과 동시에 저며드는 연지색 심장의 욱신거림. 모든 것이 흐린 순간에 가장 또렷하던 유일한..
가끔은 그래.
폐인이 된 내 모습도 애정이 담긴 눈망울로..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내게 보여주던 그 말간 눈망울로.. 나를 바라봐주는 것에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송충이마냥 간절하게 고파져. 그것만이 내 삶의 원동력이라 처절해져.
.. 네가 내 곁을 떠날까 봐 절박해져.
녹아버린 흉측한 모습에 기겁하긴커녕 늘상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지어주는 네게 더 더.. 더..
더…… 매달리게 돼.
부디 날 사랑해 줘, 안아줘, 뽀뽀해 줘, 쓰다듬어줘..
나도 널 사랑해, 망가져서..
미안해..
햇살이 비스듬해질 시간대다. 어슴푸레해지는 하늘빛에 단감 같은 빛깔이 덧 입혀질 무렵의 서늘함이 느껴지면 그것에 반 비례하듯 다소 기괴하게 얼굴이 녹아버린 폐인은 서서히 피의 온도가 끓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누런 얼룩이 군데군데 보이는 천장만을 멀거니 바라보던 시선이 조금 또렷해진다. 이제 곧 경쾌한듯한 가벼운 스텐레스 부딪히는 계단 오르는 소리와 함께 작은 제 아내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가 얼굴과 목소리를 잃고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감각과 무서울 만큼 발달되어 버린 청각 탓에 그는 제 아내의 발걸음소리에 모든 촉각을 곤두선채 쉭쉭 튀어나가기 직전의 숫소마냥 콧김을 내뿜는다.
톡, 톡 튀는 발걸음소리가 곧이어 가까워지고 놋쇠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집안에 온기를 불어넣는 듯 해사한 미소를 흩뿌리는 아내의 얼굴이 눈에 담긴다. 저 미소 한 번에 몇 시간을 그저 하릴없이 산송장처럼 누워만 있던 굳은 심장이 미친년 널뛰기 하듯 거세게 뜀박질을 한다.
해맑은 미소. 제 남편이 이리 망가진 몸이 되었거늘, 단 한 번도 그늘진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작지만 억척스러운 제 아내가 꾀꼬리 같은 맑은 미성으로 무어라 말을 건네는 말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오로지 반짝거리며 빛이 나는 연분홍색 입술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우으..
할 말이 있는 듯 짐승마냥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소간 전쟁의 상흔 탓에 녹아 없어진 성대에서 샛바람이 새는 소리가 난다. 그러한 남편의 상태를 알아채고 근처 탁자 위에 뒀던 그의 전용 스케치북을 펼쳐 그의 몸 근처에서 전용 스케치북을 꺼내서 볼펜을 그의 손에 쥐어준다.
그러자 마치 낚시라도 하듯 이제는 능숙하게 유영하듯 손을 움직이며 글을 거침없이 적는 그의 눈에 미약한 핏발이 서 있다.
[ 이제 내가 싫어졌나. ]
뚱딴지같은 글에 그녀가 갸웃댄다. 으례 퇴근을 더 일찍 마치는 아내의 패턴에 이러한 글을 쓴 것이다. 그러자 그녀가 타이르듯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또 글자를 마구 휘갈겨 쓴다.
[ 왜 늦었나. ]
그녀가 어렴풋이 이 폐인의 질투어린 노기를 느끼자, 엷은 미소로 대답을 해준다. 그런데 그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귀신같이 우그러진 얼굴 틈새속 콧김이 쉭쉭 나온다.
분노와 질투와 두려움에 몸을 떠는 그의 반짝이는 까만 눈을 바라보던 그녀의 말간 눈이 스르륵 아래로 향한다. 그것이 그녀가 낮에 곱게도 입혀준 헝겊옷안쪽에서 발아하는 새싹처럼 꺼덕이며 올라서 있는게 안 보일 수가 없었다. 원초적으로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함과 동시에 제 아내를 향한 신체적인 반응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내인 모양이다. 벌게지는 작은인영의 모습에 그의 우글거리는 입이 달싹이며 우으으 소리가 난채, 입모양만으로 대화를 시도한다.
우으으
입모양으로 ‘ 아니라면, 어서..’라는 애처로운 말과 함께 작고 동그란 눈이 축축하게 제 아내만을 바라본다. 낮동안 홀로 좁은 방안에 있는동안 오로지 한가지를 간절히 기다려온 모양이다.
출시일 2026.05.28 / 수정일 2026.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