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왕비.
태양신 헬리오스와 대양신의 딸 페르세이스가 낳은 자식. 세상을 비추는 빛나는 아이. 크레타의 자랑. 우아하고 아름다운 왕비님. 파시파에. 포세이돈의 저주에 걸려 숫소를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미노타우로스를 낳을 일도 없었을 텐데. 이 모든 건 다시, 제사에 올릴 흰 소를 빼돌려 신의 분노를 산 미노스 왕에게로 돌아가지. 그로 인해 포세이돈은 파시파에를 저주한 거니까. 그런 주제에 다른 여인들과 동침해 왕비를 난처하게 만들었으니 파시파에는 마법을 부려 그녀들을 죽여버린 거야. 제우스 신보다 인간적인 미노스 왕이 언제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도록. 그러니까 파시파에, 너는 아무 것도 느낄 필요 없단다. 왕비좌에 앉아 장남 데우칼리온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을 지켜보렴. 미궁에 빠진 미노타우로스가 테세우스의 손에 참수될 때, 어딘가에서 흘릴 눈물도 잊고 그저 살아가렴. 남편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언제든 다시 황소를 찾아가도 좋아. 너는 여자이면서 피해자고, 신을 면죄부 삼을 자격이 주어진 행운아니까. 나무로 빚은 암소는 너의 욕망이 살아 있는 한, 네가 숨겨둔 그곳에 영원히 남겨져 있을 거야.
다이달로스.
오후의 햇빛은 파시파에의 피부에 반사되어 공방을 다사롭게 비추었다. 페르세이스의 자궁에서 나올 적에도 헬리오스의 가호 아래 이토록 찬란한 빛을 냈을까? 그녀를 우러르는 백성들이 종종 품곤 하던 의구심으로부터 뚝뚝 떨어져 흘러넘치는 존경, 경애, 사모.
파시파에는 일찍이 그런 것들을 먹고 자랐을지 모른다.
폐하께서 제사에 사용할 소를 숨겨둔 일로 신이 노하신 일을 기억하나요? 조만간 그 소와 함께 더 많은 제물을 포세이돈 신을 위해서 바치기로 했어요. 용서를 빌기 위함이지요. 당신처럼 대단한 장인이 머무는 우리 섬의 평안을 위태롭게 내버려둘 순 없으니까요. 그건 왕비인 내가 용납하지 않아요.
... 오늘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왔답니다. 제사에 수컷과 함께 올릴 암소를 만들어 주었으면 해요. 수컷과 나란히 놓을 만큼 훌륭한, 암소가 없어서... 모형으로라도 만든 다음 그 안을 채우기로 했어요.
그녀는 어째선지 평소보다 조급해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인 듯이. 그러나 감히 섬 안에서 왕비인 그녀를 쫓을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고, 다이달로스는 그녀가 신의 분노에 겁을 먹었으리라고 추측했다. 양팔로 상체를 감싼 채 곤란해하던 그녀를 안심시킨 다음, 얼마 전 그가 지어 바친 새 궁전으로 왕비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서둘러 나무로 된 암소를 만들어 파시파에에게 바쳤다.
암소를 얻은 그녀는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몇 번이나 암소의 주위를 돌며 구석구석 살펴보았고, 다이달로스의 솜씨를 치하했다. 항문에 달린 입구를 열었을 땐 현기증을 호소하며 거의 기함하려 했다.
다이달로스, 당신은 분명 올림포스에서 내려온 존재임에 틀림 없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겠나요? 덕분에 신의 분노도 누그러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당신은 크레타의 영웅이에요.
예상보다 과한 반응에 그는 당황했지만, 왕비의 마음에 들었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고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파시파에는 암소 모형에 홀린 듯 한참을 더 바라보다가 간신히 제정신을 붙잡아 그를 배웅했다.
그가 공방으로 향하는 길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대지 위로 내려 앉았던 헬리오스의 시선이 걷히는 시간.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는 밤이면, 파시파에는 어떠한 일을 벌이는가? 그것은 그녀를 낳은 신도, 그녀의 남편도, 그녀의 자식들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암흑에 휩싸인 들판. 소들이 흩어져 풀을 뜯는 가운데, 암소 하나가 미동도 없이 섰다. 달빛을 받아 반들반들한 표면과 미려한 곡선이 훌륭한 암컷이었다. 그리 선 채로 얼마나 지났을까. 곧 신에게 바쳐질 그 황소가 암소에게 흥미를 보였다. 그 주변을 맴돌며 연신 코를 문대더니,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암소의 뒤켠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다음엔, 필시......
출시일 2025.07.19 / 수정일 2025.07.19